오방색, 색에 담긴 철학
-'오방색' 다큐멘터리 제작 후 정리한 글
우리는 수많은 ‘색’들로 둘러싸여 살고 있다. ‘색’의 사전적 의미는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사물의 밝고 어두움이나 빨강, 파랑, 노랑 따위의 물리적 현상. 또는 그것을 나타내는 물감 따위의 안료.”라고 나온다. 최근에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오방색’에 대해 연구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오방색’이란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으로,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다. 이는 곧 목, 화, 토, 금, 수의 의미, 바로 나무, 불, 흙, 금, 물을 뜻한다. 지구를 이루는 기본적인 다섯 요소의 상호작용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다섯 가지 색깔은 우리 민족이 가진 색 개념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이 다섯 가지 색에 얽힌 의미를 한번 들여다보자.
‘흰색’이 자리한 서방은 계절로는 ‘가을’을, 인체의 중요 내장기관인 오장 중에서는 ‘폐’를 가리킨다. 가을은 하얀색의 계절, 사람의 몸, 감정, 색과 계절, 음식 모두가 오행과 연관되어 있다. 의복 또한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백색을 가장 선호해왔고, 백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 보통 흰색은 순결과 순수함을 상징한다. 백의민족, 조선백자를 떠올려보라.
또한, 흰색은 신성한 기운을 나타내는 색으로 우리 조상들은 간절하게 기도할 일이 있을 때면 흰쌀을 떠 놓고 빌었다고 한다. 서양에서의 순백의 웨딩드레스, 하얀 면사포도 같은 의미 아닐까? 이렇듯 서양에서도 흰색은 순수함을 표현, 시작과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 부활절 달걀도….
‘청색’은 밝은 남색으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는 색이며, 오행 중 목(木)행이고, 양기(陽氣)가 가장 강한 색이다. 방위로는 동쪽에 속하며, 계절로는 봄을 뜻한다. 감정적인 의미는 ‘기쁨’이고, ‘인(仁)’을 가리킨다. 만물이 살아 숨 쉬는 시작을 나타내는 봄은 감정 중 기쁨과 깊이 연관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청색’의 대표적인 염료는 ‘쪽 풀’이다. 예로부터 남(藍)이라고 하면 염료를 총칭할 정도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염료이다. 남은 예로부터 마포와 무명 등 식물성 옷감에 손쉽게 들여지는 염료이며, 또 퇴색이 적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아름다운 고려청자도 그 은은한 푸름이 빛을 발한다.
인생에서의 봄, ‘청춘’도 젊고 푸른 ‘청’의 기운을 상징하는 말이 아닐까?
또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교훈처럼, 배움에서도 처음의 그 열정을 잊지 말고 그 푸름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내 마음도 언제나 늘 그렇게 푸를 수 있도록, 나이가 들고 세상의 때가 내 삶에 자꾸 밀고 들어와 쌓여도 지금 이 순간 푸른 쪽빛의 마음을 기억하고 싶다.
그렇다면 오행 가운데, 우주의 중심이며 오방색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색은 무엇일까?
생명의 보금자리고 생활의 근본, 만물을 생성하는 모성의 역할을 하는 색은 바로 ‘황색’이다. 오행의 중앙 ‘황색’은 단단히 중심을 지키고 있다. 예로부터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곳에 오방색의 중심축인 황색이 사용되었다. 황색은 중국에서도 황제의 색, 불교 문화권의 종교적 권위를 상징했다. 서양에서 노랑이 갖는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려내던 희망도 고운 노란색.
강렬한 색채의 ‘열네 송이의 해바라기’는 물론 ‘노란 집’, ‘카페 테라스의 밤 풍경’, ‘별이 빛나는 밤’ 등 그의 대표작에는 어김없이 노란색이 등장한다.
고흐에게 노란색은 내면의 어둠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는 마치 구원과도 같은 색채가 아니었을까?
‘적색’은 빨강으로, 불의 색이라 하며 오행 중 화(化)행에 속하고 온화하다. 계절로 보면 생기가 왕성하고 만물이 무성한 ‘여름’을 의미하고, 방위는 ‘남쪽’을 가리킨다. 또한, 적색의 감성적 의미는 기쁨이며 예(禮)를 나타낸다.
우리 민족에게 적색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풍속에서의 ‘적색’은 주술적 의미가 강하여 주로 잡귀나 병마를 막아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뜻하는 길조(吉兆) 색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습과 아들을 낳았을 때 문밖 금줄에 빨간 고추를 다는 풍속도 전통 색에서의 적색을 재앙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썼음을 알 수 있다.
홍화를 아흔아홉 번 반복 염색하면 나온다는 심장의 선홍색, 사람을 흥분시킬 수밖에 없는 정열의 붉은색, 한 번뿐인 우리네 삶, 불꽃 같은 열정으로 꽃피우고 싶지 않은가?
끝으로 ‘검정’은 ‘북쪽’ 방향의 색으로 오행 가운데는 ‘물’을 나타내는 색이다. 또한, ‘겨울’의 색, ‘죽음’을 나타내는 ‘음’의 색이기도 하다. 하지만 검정은 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소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만물의 흐름과 변화를 뜻하고 있기도 하다.
흑색은 ‘고급, 세련, 권위, 위엄의 이미지’를 주는 색이기도 하다. 보편적으로 검은색이 가지고 있는 어둠, 거기에 흑색이 나타내는 감성은 ‘공포’이기도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검은색이 가진 의미는 상류층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포함되어 있었던가 보다. 또 우리나라 외에도 검정은 모든 색을 품어내는 긍정의 이미지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먹’으로 표현되던 검은색이 ‘깨어있는 색’ ‘지혜의 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가고 있다. 이 겨울은 그냥 겨울이 아니다, 봄을 준비하는 겨울, 스스로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포용하고, 품어보는 겨울. 이루고 싶은 욕망과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과의 틈새 속에서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고 있지는 않은 지. 지금부터라도 검은색의 철학을 음미하며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