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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Apr 28. 2020

뚜껑 아래

난 뚜껑 아래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 따지 않은 채 겉면만 보면 뚜껑은 윗면만 보이고, 뚜껑을 따버리면 마시다 남기지 않는 한 다시 찾지 않게 되잖아. 심지어 캔 같은 경우에는 용기마저 일회용이라 (사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뚜껑인지도 잘 모르겠어) 개봉된 순간 명을 다 했다고 봐야 하지. 이렇듯 뚜껑의 수명은 용기의 수명에 종속적이면서, 항상 그보다 작거나 같단다.


한창 뚜껑 밑면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지. 비타500 등 일부 병음료가 뚜껑 아래에 이벤트 당첨 여부나 그 참가를 위한 코드를 기입해놓곤 했어. 그렇다고 뚜껑이 목적으로서 대우받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야. 지금껏 이벤트를 위해 그 음료를 사먹었다는 사람은 본 적 없었어. 이벤트는 음료 구매 목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제한적으로 발현되는 성질이었고, 뚜껑은 그 이벤트라는 전제 하에 국소적으로 활용되는 수단이었으니까, 종속의 연결고리는 다시 음료-이벤트-뚜껑으로 확장되는 거야. 뚜껑이 불쌍해서 어떡하나, 참.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면을 어떠한 다른 목적도 없이 순수히 도덕적 의무로서 바라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뚜껑을 단지 뚜껑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견해는,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을 모든 것 그대로 바라본다는 가정에서만 유효한데, 이 가정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해. 모두가 무생물을 무생물로, 생물을 생물로, 특히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뚜껑에 전해지는 관심의 수준이 다른 유용한 사물이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여도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거야. 이러한 만물에 대한 관심의 실질적 평등이 일대일대응을 이루어야 하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임을 인정해. 우리는 당장 동물과 인간의 권리가 어떻게 다른지, 혹은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 사회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 한 상황이잖아. 그러나, 실질적 평등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현 상태가 어떠한 정의에서도 실질적 평등을 이루지 않은 상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단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물을 바라보듯 생명을 바라보는 중이랄까?[1] 사물에 도달하는 관심과 동식물, 사람, 지구에 도달하는 관심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달까? 따라서 ㉠의 견해에 나는 동의할 수 없어.


[1] 이는 사물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루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어.


㉠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나의 견해는, 결국 뚜껑을 뚜껑으로 응당 바라보아야 하는 것과는 다른 수준으로 그를 바라볼 필요성을 제기해. 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의인" 내지는 "활유"를 제시하고 싶단다. 생명성이 부재한 무생물을 마치 사람처럼, 생물처럼 대함으로써 관심의 과잉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야. 이는 현대사회에서의 관심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해결한다고 할 수 있어.


하나, 관심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의 문제를 거시적 관심 총량이 부족하다는 문제로 치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대상에 도달하는지와는 무관하게 관심 자체를 늘리면 된다고 이야기해. 뚜껑이든 사람이든 그에 대한 관심을 늘리기만 한다면 총 관심은 늘어나는 거니까 바람직하다는 것이지. 공리주의와 굉장히 비슷한 입장이야. 그러나 관심의 질적 차이를 모두 사상시키고 있고, 관심의 재분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어. 물론 관심 재분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관심의 양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그런 면에서 나는 두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야. 관심의 질적 수준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대상에 대한 관심 수준이 모두 달라야 함을 요구해. 애초에 "대상"이라는 개념이 몹시 넓어서, 사람으로 치면 각 개인뿐만 아니라 개인이 모인 공동체, 공동체가 모인 국가, 국가가 모인 세계, 세계를 품는 지구와 그 이상의 무엇까지 관심 수준에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해. 그러나 정답이 있는 것은 또 아니어서, 단지 모든 대상에 대한 관심이 모두 늘어나는 상태는 바람직하다고만 이야기해. 관심의 파레토원칙인 셈인데, 솔직히 지나치게 원론적인 수준이라는 비판도 동의할만해. 하지만 이 입장에서 의인과 활유는 더욱 풍부한 의미를 가지게 돼.


동식물의 의인화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법하니 잠시 차치하고, 대상을 무생물로 국한하여 보자.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살아 있는 듯 대하고 가끔은 사람처럼 대하기도 한다면 무생물로서는 ㉠ 이상의 양적, 질적 관심을 받은 셈이야. 그로써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상상력"에 있어. 적정관심수준을 찾아내는 문제는 대부분 역지사지를 기반으로 한 풀이로 해결하는데, 문제는 역지사지 능력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이고 이 역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거지. 따라서 이 역시 그 해가 크면 클수록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데(∵관심의 파레토원칙) 이러한 해결법을 개인이 채택할 가능성은 상상력에 비례한다고 알려져 있어. 여기서 상상력이란, 관심의 대상이 관심을 받았을 때 어떠한 느낌을 가질 것인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해. 의인과 활유가 좋은 해결책인 이유는 바로 상상력을 늘려주기 때문이야.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하지 않는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거나 본인이 빙의까지 할 수 있다면, 임의의 대상에 대한 관심은 충분히 늘어날 거야.


결국 요지는, 의인과 활유를 통해 상상력을 기를 수 있고, 상상력은 역지사지법을 통해 도출하는 최적관심수준을 증가시키며, 이는 관심의 파레토원칙에 부합하므로 양적, 질적으로 현대사회의 관심 문제를 해결한다는 거야. 물론 위와 같은 논의에도 여전히 한계가 있어. 모든 대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늘리는 것이 좋다지만 우리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가 줄 수 있는 관심은 그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몰라. 이 문제를 관심 보존 가설이라 부르는데, 만약 증명된다면 최적관심수준을 도출하는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야만 할 거야. 관심의 양과 질을 중시하는 각각의 입장이 기어코 무시해왔던, 각 대상에 대한 최종관심수준을 하나의 정답으로 확정짓는 문제가 대두될 테니까.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질지 정말 기대돼.


멀리도 왔네. 그러나 위와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심의 파레토원칙은 아직까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모두들 뚜껑 아래에 많은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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