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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May 07. 2020

무엇이든 자주, 오래 만난다는 것

요즘 독서실도 많이 철저해져서 단순 출입을 위해서라도 왼손 엄지를 붉은 빛 반짝이는 지문인식기에 갖다대어야 한다. 등록된 지문임을 확인한 리더기는 도미솔(이라 생각되는 차임벨)과 파란 불빛으로 입장을 환영해준다. 그런데 막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시간이 정말로 오래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슬쩍 지나가기만 해도 도미솔을 쉽게 울려주던 이 리더기가, 나에게만은 갑자기 출입국심사관이 되어 당연하단 듯 purpose of visit을 물어보는 것이다. 어, 어, studying? 이라고 답하면 한참 부족하다는 듯 삐삐빅을 외치며 나를 물러서게 만들곤 했다. 입장하지 못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할 정도로 밀도 있게 공부하는 편은 아니라서 관련한 큰 고민은 없지만, 돈 내고 다니는 독서실마저 나를 가끔받아주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조금 울적해지는 적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로 다니기 시작한 지 두어 달, 마침내 그는 나를 독서실의 일원으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전에 비해 나를 알아차리는 시간이 눈에 띄게 짧아졌고, 특히 나의 입장을 비토하던 초창기의 버릇을 완전히 뜯어고친 듯한 변화가 있었다. 지문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독서실 다니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무엇이 이런 환대를 만들어냈나, 생각해보니 단지 내가 자주 방문한 것뿐이었다. 주워 들은 이야기지만 컴퓨터가 자주 확인하는 데이터는 처리시간이 짧아진다고 알고 있다. 리더기 입장에서야 내가 하도 왔다갔다 거리니 귀찮다는 이유로 내 지문을 우선순위로 올려놓았겠지만, 나로서는 오랜만에 큰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비록 무생물일지어나 나와의 만남이 그에게도 확실히 각인되었다는 뜻일 터이니. 반기든 반기지 않든, 나를 기억해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


조금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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