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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Mar 17. 2022

데칼코마니

숱한 오르막을 걸어올라 이제 내려갈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극대가 무슨 원수처럼만 느껴졌는데, 유이한 소유물로서 오르막의 추억과 내리막의 장래가 정확히 양분되어서 한순간은 데칼코마니 같은 인생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면에 덕지 바른 노력으로 나머지 절반까지 채우는 체계적 모방이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그렇게 완성된 좌우대칭은 온전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수익률 100퍼센트의 가치 투자입니까, 아니면 편법에 기생하는 부도덕한 양심입니까?


혹자는 희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지적합니다. 오르막은 자주 무채색으로 칠해지어 내가 좋아하는 채도 높은 원색들은 당최 나타나주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막대한 크기만큼 달성될 다른 면의 무임승차 역시 거대한 수준이므로 양이 질을 보상한다는 산업혁명적 원념이라도 사수하자는 마음이겠습니다. 흰 공백을 도저히 용납 못 하는 사람과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회색을 눌러 찍는다고 무슨 변성이라도 일으키겠습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색을 칠하다 흑화한 것을 본 적은 있어도 흑색에서 다채색을 분리해주는 속편한 원심분리기는  적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넓단들 하얀 배경에 검은 그림은 하얀 배경에 검은 그림을 재차 낳을 뿐입니다. 책을 열고 닫는 행위는 모든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요.


그럼 당연히 유추 가능한 것은 유채가 유채를 잉태하는 황금 오리알이겠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달성한 무채로 남은 인생까지 얻어먹자는 무슨 학벌주의 마인드가 아니고, 이제라도 색 담긴 노력을 한 방울 찍는다면, 일채가 다채 되는 용기와 안목이 자리잡는다는 것입니다. 일채에 대한 원추세포를 자극하는 것이 다른 색까지도 고루 살린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입니다. 무지개를 보고 아름답다 하는 것은 분명 그런 류의 보람 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빨강을 깨닫고 노랑을 깨닫고 파랑을 깨닫게 된다면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정직한 뿌듯함을 더할 터입니다. 잿빛마저 한 폭의 그림으로 아우른다면 오르막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만한 고마움이 없겠습니다. 아, 감탄 절로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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