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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Jan 13. 2023

유행

t+1기 유행이 달라지는 것은 t기의 유행과 달라야 한다는 순수한 차별의식 때문이라고 가정하자. 따라서 연속적인 두 기의 유행은 서로 이질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t기에 A가 유행했다면 t+1기에는 B가 유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t-1기와 t기 사이에도 성립하고 t-2기와 t-1기 사이에도 성립하며... 최초의 기와 최초+1기 사이에도 성립할 것이므로 유행의 변화는 4색문제의 시계열적 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색만으로 충분한 게 뻔히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행은 단순히 A-B-A-B-...의 이진법적 반복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 기 유행은 당장 지난 기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면서 그 이전 기와는 조금이나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t-1기의 유행이 A이고 t기의 유행이 B였다면 t+1기의 유행은 B와는 확실히 다른 A류이되 t-1기 유행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A'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두 가지 종류의 유행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 덕분에 모양새가 조금씩 변형된다. 가장 단순한 예시는 A-B-A'-B'-A''-B''-... 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 소비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바 그 정체에 대해 생각해볼 법하다. A'와 B가 구분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는 종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이종에 이르지 못 하는 변화라고 일컬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인공적 돌연변이이다. 사람들의 연구와 실험으로 A의 다양한 아류가 만들어졌을 것이며 그 중 주류로 채택된 것이 A'이다. A'는 시장의 선택을 통해 "A의 재해석" 내지는 "A의 현대화" 따위로 명명된다.


한편 '가 원본에 비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누군가는 현대의 비약적인 기술 발전 덕분에 과거의 유행을 재현하는 것 이상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덧붙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반드시 발전이라고 본다. 반면 다른 누군가는 단지 과거의 모든 유행과 달라야 한다는 암묵의 압력에 의해 생겨난 아종일 뿐 그것이 무슨 방향성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본인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돌연변이가 반드시 진화를 의미하지 않듯 A' 역시 A의 진화된 산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A'는 A의 매력에 여러 부가 요소를 덧대놓았겠고 생물학에 따르면 이러한 이종 교배는 생존에 더 유리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시장 환경은 자연 환경과 다르다. 사람들의 선호 분포가 균일하다 가정하더라도 시장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본 분포가 상이하다면 A가 A'보다 선호될 여지도 충분하다.[주] 자연적 압력과 달리 시장적 압력은 각 개체가 환경에 대해 갖는 영향력의 크기가 달라서 순종이 잡종보다 생존에 더 유리한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의 유행을 누리며 과거를 폄하하는 것은 근거가 다소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기회 집합의 확장이 반드시 더 나은 선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예술사적 원칙과 사람들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분포 때문에 유행은 기본적인 대전제 안에서 여러 방향으로 진동한다. 와중에 발전을 거듭하는 '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겹겹이 누적되어 이종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이따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임은 기업도 소비자도 모두 알고 있다.


오늘날의 만사가 과거의 교훈을 적절히 재조합하고 그것과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면, 그 노력에 경탄함과 동시에 최초의 기틀을 마련한 역대 인류에게 고개 숙이는 일 역시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명이든 삶이든 꼭 옛것에 기대지 않은 것이 기 때문이다. 어제에 감사하며,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기 위한 성실의 기질만큼은 온전히 진화의 덕이라고 보아야 할 듯싶다.



[주] 물론 오늘날 기의 유행과 이전 모든 기의 유행이 상이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A가 한 번 유행한 이후 다시 유행할 일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의 아류인 A'가 반드시 시장적으로 더 선호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A'는 A보다 열등한 것이지만 단지 A와 달라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억지로 '라는 수정을 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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