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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Nov 10. 2015

안경집이 망했다.

언제 망했는지도 모르게 망했다.

내 안경의 역사는 대개 네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철테

2. 알은 철테, 대는 플라스틱

3. 얇은 플라스틱

4. 얇은 플라스틱, 두꺼운 플라스틱 혼용 (현재)


처음 안경을 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누군가의 음모로 6~7살 경에 컴퓨터 게임이라는 걸 배웠다. CRT 모니터에 Windows 2000을 쓰고 있던 그 컴퓨터에 친척 중 누군가가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설치해놓은 것이다. 이게 무언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나와 동생은 로그인하는 법을 차차 깨닫고는 순식간에 게임 중독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조건 컴퓨터 앞에 앉았고, 학교에서  끝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으며, 부모님이 퇴근하시기 직전에야 공부하고 있던 척 책상 앞에 앉았다. 이 짓을 8년 동안 했다. 한 번 간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1~3에 해당하는 안경은 놀랍게도 모두 한 집에서 맞췄다. 작은 도시의 꽤나 번화가에 위치하는 집이었다. 역에서 걸어가면 1분도 걸리지 않는 꿈의 자리에 위치한 안경집은 큼지막해서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폐장 직전에 찾아가도 꼭 두 세 명 정도는 안경을 새로 맞추거나 수리하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즐겨 찾았던 이유는 안경도 패션이라는 어른스러운 사고를 갖추었던 것은 전혀 아니고, 지루해할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만화책을 상시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목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은 시리즈였고 심지어 40 몇 권부터 띄엄띄엄 있었으니 세심함은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으나, 애들은 어차피 그런 거 일일이 따져들지 않는다는 점을 주인장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주스까지 쥐어다 주니 (준) 천국처럼만 여겨졌다. 안경이 고장 날 때마다 내심 기뻐했던 이유다. 여긴 아직까지도 건재한 모양이다.


4는 새로 이사 온 집 앞에서 맞췄다. 어느 날, 정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는데 3의 콧대가 똑, 부러지고 말았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에 안경집이 있는 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와중, 너무나 가까운 곳에 안경집이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은행 ATM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안경집은 주위의 어느 매점보다도 작았다. 호프집보다도, 편의점보다도,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ATM 출장점보다도. 아르바이트도 단 한 명만을 고용하셨다는 사장님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렌즈 끼시는구나 싶어서 저도 렌즈로 바꿀까요? 사장님은 어떤 거 끼고 계세요? 여쭈어 보았더니 그의 대답은


"하하. 전 렌즈 안 꼈는데요."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안경집 사장이 안경도 렌즈도 끼지 않는다. 마치 고깃집 사장이 채식주의자인 것만 같은 뒤통수. 자신도 한평생 먹어보지 않은 고기를 남에게 판다면 여기서 합리적인 소비자의 판단은 어떠해야 할까. 당연하다. 먹지 않는다. 가지 않는다. 망하고 다른 집이 들어서기를 기다린다. 나는 그 집에 안경을 맡긴 것을 한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심지어 그 집에서 안경을 새로 맞추기로 했다. 매점 크기도 작았던 탓인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마음에 쏙 드는 프레임은 찾기가 어려웠다. 여차 저차 해서 3과 상당히 흡사한, 하지만 색이라던지 알 크기라던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가 있는 안경을 구입했다. 이런 사소한 차이를 남들이 알아볼 것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명백히 자의식 과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세상 모든 패션이 그렇듯이 본인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부분을 갖고 죽을상을 짓는다. 그래서 막상 사긴 했지만 잘 쓰지는 않는다. 아니, 고백하자면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나는 3의 안경이 영구하기를 바란다.


썩 만족스럽지 않은 프레임을 고가를 주고 샀다니 기분이 많이 상했다. 그 안경집 탓일 리 없는데도 왠지 예전의 안경집이 점점 그리워졌다. 지하철로 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지만 다음에는 차라리 그곳을 들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안경집을 볼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 등하교하는 코스까지 바꿔버렸다. 해당 안경집에 대한 증오는 오늘 내일로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새 안경을 샀던 게 5월 경이었으니  6개월가량은 그냥 무시하면서 산 것이다. 존재를 애써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노력도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보지 않으면 저절로 멀어진다. 어느새 증오도 한 때의 감정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평소와는 다른 길로 하교 하기로 마음 먹었다. 원래 루트는 서소문로 고가가 끝나는 쪽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골목길을 들어가면 바로 아파트 입구가 나와서 시간 아끼기로는 제격인 길이었다. 그런데 그 비좁은 길에 커플 한 쌍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제엔장, 무시하고 앞지르기 하기에는 길이 너무 좁다. 그곳에서 어떤 전개가 펼쳐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음땡도 아니고 눈 감고 걸어갈 생각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중구 주민센터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다소 꼬불거리는 언덕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면 안경집 왼쪽에 위치한 치킨집이 보인다. 아직 7시면 술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부터 호황이다. 치킨은 어느새 시대를 풍미하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피자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썩 반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지만, 뭐 어때, 하면서 아파트 입구를 향하는 찰나―


불빛이 반짝거리는 두 매장 사이에 있으니 어둠은 더욱 공허해 보였다. 양 옆에 빛을 끼고도 블랙홀은 제 몫을 하고 있었다. 마치 별을 인질로 잡은 중성자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별은 중성자별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햇빛이 들지 않는 저녁이라는 시간은 빛보다는 어둠에 훨씬 친화적이고 그가 더 자연스러워 보였으나 인류는 지지 않는 태양을 원했다. 끊임없이 빛이 세상을 비추고 돈은 시장에서 오고 가야만 했다. 반짝거리는 저것은 분명 돈이렷다. 어둠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가까이 가보니 주인장의 짤막한 작별 인사가 적혀 있었다. 매장 안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부득이하게 매장을 닫습니다. 지금까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누가 사랑했단 말인가. 적어도 나는 사랑하지 않았다.


안경을 쓰지 않은 사장이 운영하는 안경집을 사랑할 사람들은 없었다. 나에게 사랑의 대상은 어떠한 물체도 자본도 될 수 없었다. 다만 끝까지 존댓말을 쓰시던 그 집의 사장님, 두 명밖에 없어 적막할 텐데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유일한 알바 분. 자주 들르진 않았지만 어쩌다 지나칠 일이 있으면 항상 눈인사를 건네던 그들이었다. 안경집에 대한 증오는 그 집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이어질 수 없었다. 나는 언젠가는 부러진 안경을 쥐고 그 집에 방문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하면서.


그러나 오늘부로, 아니, 내가 확인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집 앞의 가까운 안경집을 잃어버렸다.


안경 콧대를 만져보았다. 분명 이 집에서 새 안경을 사면서 같이 고쳤던 콧대다. 단단한 게 다음에 부러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이제는 더 큰 안경집을 찾아야 할까. 적어도,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집으로.


'임대계약 급구'라 적힌 종이는 어둠에 가려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한동안 어둠이 지배할 모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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