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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antasia

머리카락

by ggom

처음에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매번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빗과 드라이기로 낑낑대는 게, 때로는 수차례의 매직으로 모든 곱슬을 죽여놓는 게 번거로웠을 뿐입니다. 저절로 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잠깐의 실험을 한 것이 이렇게나 효과적일지 몰랐습니다.


제 구상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스스로 펴졌으면 좋겠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의지를 그들에게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초 의도했던 것은 단지 입력에 따라 출력을 내놓는 기계 장치로서의 작동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머리카락도 생명의 부산물이라 그런지 기계성을 부여하는 것이 영 쉽지가 않더군요. 단백질에게는 단백질에 맞는 원리를 부여해야 했고,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며 기초적인 의지를 주기로 했습니다.


갓 태어난 의지적 머리카락들은 정말 귀여웠습니다. 아이나 애완동물이 그러는 것처럼 처음에는 제 말을 너무나도 잘 따르더군요. 이리 뻗으라면 이리 뻗고, 저리 뻗으라면 저리 뻗고. 저는 곱슬에서 해방되는 것 이상으로 현존하는 머리카락의 범위에서 가능한 모든 스타일링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어요. 낳기를 잘 했다고 몇 번이나 거듭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니까, 머리카락들은 자라는 법입니다. 자기 의지에 익숙해진 머리카락들은 점차 제 말을 듣지 않게 되었어요. 이리 뻗으랄 때 저리 뻗고, 저리 뻗으랄 땐 가만히 있고. 제 머리도 점점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기존 곱슬머리는 보기에는 거슬릴지언정 일관성이 없지는 않았는데, 수만 개의 머리카락이 제각각 움직이니 무슨 정신착란이 두피 밖으로 삐져나온 모양새였습니다. 저는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충전된 바리캉의 전원을 막 켰을 때였습니다. 위협적인 진동을 감지한 머리카락들이 탈출을 감행했을 때 말입니다. 나이가 실컷 넓힌 모공을 탈출하기는 썩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나오기 어려워하는 어린 머리카락들을 양옆에서 붙잡고 도와주는 모습에 살짝 감동하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런 상부상조 덕분인지 탈출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자존심과 스트레스가 일거에 척결되고 말았습니다.


한동안은 머리카락들을 수소문했습니다. 집안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대다수의 머리카락들은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개중에 운이 좋았던 녀석들은 수챗구멍이나 현관문 빈틈을 통해 도망친 것 같더군요. 밖으로 나간 놈들까지 찾아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찾기도 어렵고 찾는대도 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을 테죠. 매여 있고 싶지 않다는 확고한 의지와 적당한 행운을 가진 이들이라면, 아쉽지만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복리상 타당하기도 하고요. 누군들 구속과 소멸의 공포 없이 살아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머리카락들을 찾아주신 것은 몹시 놀랍고 대단한 일이지만, 이들을 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유를 부여한 책임이 저에게도 있는 것이지요. 제 머리요? 원래 이렇게 될 운명이라서요. 그래도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해낸 머리카락들 덕분에 더 의미 있는 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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