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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om Aug 27. 2015

여름방학, 5일 남았다.

처음으로 맞이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학

생소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방학이라니?


수능 이후 맞이한 첫 번째 겨울방학은 오히려 좀 익숙한 편이었다. 연년생 동생이 그 해 고3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대학생으로서 맞이할 예고편을 찍기보다도 고3을 다시 재생하고 있었다. 그 방학의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부를 했고, 약간 지칠 법했는데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3월 2일을 맞이해 나는 정식으로 대학생이 되었다. 뭐, 정식으로 인정받은 건 그 전에 등록금을 완납했을 때의 일이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은 강당에서 김난도 교수의 축사를 들은 후 나서 부모님께서 꽃 한 바구니 안겨주시고 나서야 드디어 대학생이 된 것 같아! 말할 수 있었다. 순전 기쁘다기보다도 다소 긴장되었던 것은 학점보다도 인간관계가 신경 쓰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얕고 넓다는 대학의 인간관계는 깊고 좁은 고등학교의 경험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일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꽤나 자주 혼자 밥을 먹었던 지난 1학기를 기억한다. 사람이 좋아 산다는 좌우명을 내세우기도 민망할 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벌써 피곤해진 걸까?


이번 방학 동안 항상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나름 여행도 두세 번은 다녀왔고, 가끔씩 친구들과 만나 식사를 하기도 했으며, 온라인 상에서 친구들을 만난 횟수는 무지막지하다. 하지만 방학이 5일밖에 남지 않은 오늘, 이번 여름방학을 회상했을 때 거실이나 방 안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자신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서브컬처와의 우연한 조우는 이러한 이미지를 가속시켰다. 이렇게 글을 적는 오늘도 집에서 발자국 한 번 내밀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잉여롭게 보내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사실 방학 계획은 꽤나 거창했다. 지난 겨울방학에 공부했던 내용이 1학기 때에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약간의 공부로 2학기 학점을 챙겨먹으려는 속셈이 있었다. 적어도 수학이나 영어 정도는 감을 잃지 않게 공부하자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이 있었다.  말도 안 된다는 게 밝혀지기까지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난 날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 오늘부터 방학인가,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과 비슷한 하루가 꾸준히 반복되었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으며 아마 31일까지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미친 듯이 후회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야 할 것만 같았고, 실제로 기숙사 학교에 머물고 있는 동생이 집에 잠시 들렀었을 때 같이 독서실에 다녔다. 그동안 나는 약간의 생산성을 위해 잉여로움을 잠시 포기해보았다. 그 결과는


더욱 찝찝했다.


3일 간의 맥락 없는, 급작스러운 공부는 나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생산성에 경도되었다. 중학생 때에도 고등학생 때에도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나를 부르면 나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가며 공부할 시간을 벌곤 했다. 그 당시에는 입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이런 태도를 굳이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유지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놀면서도 약간의 자책감을 느끼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의한 관성 때문이었다. 관성은 나를 자주 조급하게 밀어붙였다. 주어진 하루 동안 문제 하나라도 풀지 않으면 그 날을 그저 망한 날로 치부해버렸다. 일상은 공부를 한 날과 하지 않은 날(나는 이런 날을 '논 날'로 불렀다. 여기서 '논'다는 것은 비행 청소년들이 '논다'는 것과 어감이 크게 다르지 않다.)로 나뉘었고, 나는 전자만을 값지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지독히도 경제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학은 오히려 꽤나 값진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무기력감은 나에게 필요한 해방구 내지는 탈출구의 다른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생의 매일매일이 양수의 생산성으로 채워질 리가 없고, 그렇게 채워져서도 안 된다는 걸 이번 두 달 반 동안 배웠다. 물론 6년 간 묵혀두었던 모든 잉여로움을 푸는데 두 달 반은 너무 모자라지만 말이다.


앞으로의 4일은 오늘처럼 푹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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