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gom Aug 29. 2015

500일 - 망각의 기억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아간 일만 이천 시간

1. 0일, 100일, 200일


사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일만 하더라도 나는 중간고사 첫 날을 막 마친 즈음에 사고가 발생했고, 내가 본 마지막 기사에서는 분명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시험을 위해 공부를 계속하다 저녁 즈음 잠시 찾아본 인터넷 기사를 보고서야 실상을 알았다. 300여 명이 구조되지 못한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모두가 보고 있었고, 모두가 거기 있었다.


기사는 꾸준히 이어졌으나 구조에 진척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끔찍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을 따랐다. 11월 13일까지 나는 수험생이었다. 애초에 수험생에게는 인격을 부여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했다. 신체의 죽음과 정신의 죽음의 공통분모를 깨닫지 않은 채, 아니 일부러 깨닫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수능을 봤다. 시간은 이미 200일이 지나 있었다.



2. 300일, 400일


300일과 400일에는 반드시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놀라울 만큼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차라리 100일과 200일에 보였던 사람들의 잦은 언급이 그리울 정도였다. 여기엔 세월호가 지나치게 정쟁화되었던 까닭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였기에,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진상규명과 피해 보상에 원활히 합의할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가장 정쟁화될 수 없었던, 정쟁화되지 말아야 했던 주제가 올려지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담지 말아야 했던 말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국가는 정확히 양분되었고 양끝 사이의 골에서 세월호가 천천히 녹슬어가고 있었다.


정치에 지친 사람들은 바로 경제로 눈을 돌렸다. 세월호 진상규명에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요즘 경기가 썩 좋지 않다는 한 마디에 자신의 밥벌이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무의식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납득하고 있었다. 이를 이해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세월호에 남아있어야 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놈의 돈이었다.



3. 500일


매일 14년 4월 16일로부터 오늘이 며칠 째 되는 날인지 세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거기에 24를 곱하여 몇 만 몇 천 시간인지 알아본 후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를 갱신한다. 일만 이천 시간. 일만 시간이 갱신되었던 416일 째, 나는 숫자의 우연한 일치에 잠시 놀란 적이 있었고, 그로부터 84일이 지난 오늘은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1년 135일 동안의 나를 기억할 수가 없다. 나는 한 때 슬퍼했고, 분노했고, 뛰어다녔으며, 외쳤다. 하지만 500일이라는 꿈만 같은 숫자를 바라본 나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500일이 지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참사 이후의 시간을 조금은 더디게 흐르게 해 달라고 물리 법칙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에게 요구했어야 한다. 아직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빨리 구조해달라고, 구하지 못한 사람들과 그 유가족들을 위해 배를 인양해달라고, 배가 왜 침몰했는지 진상규명을 서둘러달라고 요구했어야 한다. 운동하는 사람에게 시간이 더디게 간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이와 같은 일에서도 적용된다. 무언가를 했다면, 500일이 이렇게나 빨리, 잔인하게 다가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수가 적었던 것도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꾸준하지 못했다. 눈 앞의 현실이 더욱 재난 같다는 구차한 변명으로 팽목항 소식을 조금씩 무시해왔다. 이제는 모두에게 불편한 이슈라며 언급하기 꺼려했다. 세월호는 자연스레 잊힌 게 아니다. 세상에 응하는 내가 잊게 만들었다.



불편한 깨달음을 밤늦게 얻고서야 글을 한 편 적는다. 이미 시간은 또 하루가 지났다.


오늘로 501일. 그곳에 아직 사람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방학, 5일 남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