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gom Sep 29. 2019

정신없이 읽었다

이별 후 첫 휴가 때 전공서적을 하나 샀다. 새 책을 구해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지만,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일과 훈련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었다. 생각날 틈을 허용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완독하고 말았다. 마침내 여유가 생겨버렸다. 심히 불안하다.


슬슬 정리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잦아졌다. 사실 더 정리할 것이 없다. 처분할 수 있는 추억 이미 모두 처분했다. 스마트폰 용량은 새로 마련한 기기 못지 않고, 집 곳곳에 남아 있는 추억거리는 다가오는 휴가 때 시간을 들여 정리할 생각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정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역시 내 마음뿐이다. 사소한 대화나 시간의 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추억과 상상을 어쩔 줄 몰라하며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별을 거부하는 나의 마음은 그저 지난 추억에 웃고 잘못한 일에는 반성하며 그녀를 다시 만날 준비를 하라는, 헤어지기 전과 별 다를 바 없는 감정상태에 가두고 있다. 이별을 실감하는 순간 버티지 못 하리라 직감하고 나를 벼랑 끝에서 간신히 지켜주려는, 오직 선의로 가득한 방어기제다.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겉으로만은 멀쩡하게, 주어진 임무를 방기하지 않은 것은 모두 그의 덕분이다.


그러나 마음의 틈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는 순간.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아 숨겨왔던 감정을 억누를 압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사화산이 아니라 휴화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감춰왔던 울분을 모조리 토해내고,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만 끝내겠다는 이기적인 의지를 보이고 말았을 때. 그때의 특효약은 결국 자기혐오일 수밖에. 나에게 과연 슬퍼할 자격이 있나 묻는 것이 한 번, 정말로 슬픈 사람은 누구였을까 묻는 것이 두 번 - 두 차례의 질문으로 나의 격렬함은 손쉽게 거세된다. 거세의 부작용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유로운 것은 싫다. 그리고 나도.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의도치 않은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