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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순찬 Nov 02. 2020

나를 알아가는 어떤 방법


 "맛없다"


얼마 전, 학교에서 내가 내린 커피가 너무 쓰고 맛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쓰다' '산미가 강하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커피를 내려주고 싶은 마음에 1초 정도 상처를 입었지만, 나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상처의 감정은 순식 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내가 내려준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할 뻔하다가,


 '아! 내가 커피를 이렇게나 쓰고, 진하게 마시는구나.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연하게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내 커피 취향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이렇게 쓰게 마시는 줄도 몰랐던 거다. 커피란 원래 이런 건가 했던 것 같다. 더 나아가, 나는 커피를 편안함과 휴식의 도구로 쓰기보다는 '연료'로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왜 연료를 필요로 했을까? 실제로, 나는 요즘 '야근할 수 있을 때 야근하자' 마인드로 살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지지만 아무튼 '나 자신을 위해서' 많이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일과 삶을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가 시너지 되고 화학적으로 결합된 상황을 꽤나 즐기고 있다. 물론 평생 그러고 싶지는 않다. 시기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휴식과 삶이 일과 물리적으로 구별되는 삶을 살고 싶을 때가 올 것이다. 나에게도 커피가 편안함과, 휴식의 도구로 소비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길 바란다'


 이제 갓 20대가 된 제자들에게 딱 한 마디만 해주라고 한다면, 바로 이 말이다. 많은 말들을 해주고 싶지만,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이뤄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진로를 고민할 때도 우리는 어떤 진로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인가?'라고 현실적 요소들에 대해서 대소 관계를 만들려고만 한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뚜렷할수록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맞는 선택인지 알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을 밀고 나아가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좋은 선택이라고 불리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는 선택이 되기도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어쨌든,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는 것은 삶을 설계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진다. 나를 어떻게 알아갈 수 있을까? 어릴 때는 조금 막연한 입장에서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나를 알아가는 절대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한 삶을 사는 청년들을 보며 그 생각은 많이 강화되곤 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다 보니, '다양한 경험만이 삶의 정답인 듯 냥 말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고도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사는 사람은 많다.



 2013년, 대학생들과 황하강을 따라 중국 문명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사전 모임을 국내에서 여러 번 갖고, 탐방하는 동안 여러 어려움을 함께 맞이하며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탐방 후반부 어느 날, 숙소에서 모두 모여 얘기가 나오는 중 어느 누나가 나에 대해 말했다.



"너는 네 얘기만 가치 있는 줄 아냐? 우리 얘기는 시답잖냐?"



 삶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진중한 태도,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서 삶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듯한 무거운 나의 모습이 그에게 큰 거부감을 갖게 만든 것 같다. 누나는 유쾌한 이야기로 관계를 형성해나가며, 구체적인 목적성이 없어도 현재를 즐기는, 무엇이든 즐기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뭔가 성장 지향적이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를 통해 절실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그것이 나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조금씩 정의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진짜 나다운 순간과 내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영역들이 조금씩 분류되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다차원적인 이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양한 학생을 포용할 수 있는 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들이 필요할까 생각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커피가 쓰다'라는 말을 들은 순간은 커피 소비자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써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사람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것.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클리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절실히 공감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면, 다양한 경험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일정 부분에서는 설명이 될 것이다. 다양한 경험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나에게 영감을 줄 정도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거나,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면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나가는 과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김난도 교수는 레이블링 게임이라 하여  사람들이 가치가 다원화되는 시대에 타자에 의한 자아를 규정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언뜻 보기에,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요즘 가치관과 충돌되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남과 다른 나'를 정의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결국, 타자에 의한 자아 규정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규정하고 싶은 욕구가 크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접촉이 어려워지면서 자신을 '유형화'하고, '소속'을 두는 것에 큰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것으로 MBTI가 다시 유행인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을 알아가고 싶다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이고, 욕구의 반영이 시대상에 맞춰 MBTI 같은 유형화 작업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규정과 정의에 대한 개별적 욕구는 사회적으로도 확장되고 드러난다.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는 '구별짓기'라는 책에서 오늘날 문화의 대립은 분류 투쟁이라고까지 결론 내렸다. 결국, 정치의 시작은 분류하고 규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나도 30대가 되어서 어떤 30대가 되고 싶은지,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지. 나아가 나로 인해 학교가, 이 사회가,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 나갔으면 하는지 등에 대해 그려나가고 싶어 했다. 그런 욕구가 왜 있었을까? 이것이 나에게, 나아가 교육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본다면 생각해본다면 또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어쨌든 그 욕구를 충족해가며 혹은 충족하지 못함에 갈증을 느껴가며 또 살아가게 될 것이다. 책을 쓰고 싶게 된 이유도 그렇게 설명이 되는 걸까?


 최근, 책을 쓰며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나의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현재의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또 다르게 나에 대해 알아가는 순간이었는지도, 재정의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나도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기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본인의 개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고3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니 이런 순간들이 적은 건지도 모르겠다. 또한, 만나는 학생들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나를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교직생활에서의 내적 갈등의 씨앗인 걸까? '교단에 설 때, 가르치는 마음이 아닌 배우는 마음으로 서라'라는 김용택 시인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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