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한 잡담 |
폐쇄된 보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사회나 교회에서 보이는 극우적 성향까지는 아니어도 보수적이라는 통념조차 무시되어 독단적이고, 자신이 가진 전통이 관철되지 않을 때 공격적으로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려고 한다.
보수적이라는 것이 굳이 나쁜 것인가?라고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역사적 진보를 위해서는 보수적 부류가 필요할뿐더러 개인조차도 보수와 진보의 성향 모두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사회나 교회나 보수와 진보의 날갯짓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날갯짓이 부조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나 사회나 폐쇄된 보수의 가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유사한 점들이 있다.
먼저 극단의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유와 민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때로 공공성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지만 그 또한 공허한 공공성이다.
공공성조차도 개인의 이익 즉 돈, 명예, 자기만족 등 다양한 개인의 욕심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리하여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개인의 저급한 욕심 아래로 잠재되어 화석화되고 만다.
이런 현상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나타나는데 안타깝게도 민주적인 교회를 표방하는 교회일 때 더 두드러진다. 민주적이라는 것이 개인의 이익이라는 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된 것인데 이럴 때면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며 특정한 소수의 이익을 위한 자유를 주장하는데.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정 소수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자유와 민주이어야 한다.
근래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두드러진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냉전체제 속에서 등장한 반공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이기적 자유와 폐쇄적 사고가 고착화되도록 부추겼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렇게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정권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만족스럽게 들어주는 교회에 대해서는 광신적으로 추종한다는 것이다.
해당 정권이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통제했다 하더라도, 유사하게 교회의 목사가 성도들의 헌금을 착복하더라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과 사람을 적절하게 비난해 주고, 저주 설교를 퍼부어준다면 그 권력에 대한 예찬과 맹종을 멈추지 않는다.
‘자유’와 ‘민주’를 강조하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발현되는 권력에 굴종하는 것을 아주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배움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우리의 과거는 보이지 않는 몸과 사고의 기율 속에 통제와 줄 세우기가 익숙하다. 강력한 통제를 통해 안전이 담보된다면 자유와 민주는 언제나 버려질 수 있는 껍데기일 뿐이다.
사회야 그렇다 치고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안정된 구원 즉 죽음 이후 미래에나 알게 되는 불확실한 구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확정적으로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결정지어 주는 교회의 권력에 심취해 있다. 그래서 보수적인 전통에서의 ‘성도의 견인’ 교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단이라 불릴지라도 나의 내세를 확신시켜 주는 사람과 단체에 맹종한다. 구원을 확보해 준다면야 가족도 삶도 새로운 권력자에게 내어놓는다.
세 번째는 이들의 심리 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작용한다는 점이며, 이 심리는 공격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차별과 혐오의 기제로 등장한다.
‘자유’와 ‘민주’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익과 그 이익을 보장해 주는 권력에 심취하는 경향은 곧 그들이 지금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이익을 누군가가 침해하고 있고, 자신의 일상을 누군가가 파괴할 것이라는 불안이다.
그래서 경제든 신앙이든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차별과 혐오로써 타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수위는 나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안정감이 들 때까지 매우 폭력적으로 타인을 제거한다.
근래 교회가 타인에 대한 폭력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 그들의 불안이 외부로 표현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교회가 평화와 희망 가득한 복음적 메시지를 잃었다는 것이고, 교회의 정체성조차도 혼란스러운 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