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 정지된 점이 아니라 춤추는 균형.

꼼곰하게 정의하는 중용(中庸)

by 꼼곰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핸들을 가만히 중앙에 고정하면 넘어진다. 왼쪽으로 쏠리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쏠리면 오른쪽으로 끊임없이 핸들을 꺾으며 미세하게 흔들려야 중심이 잡힙니다.


'중용'은 물리적인 한가운데, 혹은 수학적인 평균값이 아니다. 1과 10 사이의 5.5, 혹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 그래서 누군가에게 중용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튀지 말고 적당히 중간만 가라는 처세술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용의 본질을 가장 크게 왜곡하는 말이다. 중용은 회색분자의 도피처가 아니다. 중용은 가장 역동적이고 치열한 선택의 결괏값이다.


진정한 중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양 극단'을 모두 품을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 가장 뜨거워질 수 있는 열정과 가장 차갑게 식을 수 있는 냉정을 동시에 가진 사람만이 상황에 딱 맞는 온도를 선택할 수 있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참는 것은 무능력이지만, 불같이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상황을 위해 참는 것은 중용이다. 즉, 양쪽 끝을 모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중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용은 회색분자의 도피처가 아니라, 양 극단의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자의 여유다.


세상일은 O, X로 이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용기가 지나치면 무모함이 되고 부족하면 비겁함이 된다. 긍지가 지나치면 오만함이 되고 부족하면 비굴함이 된다. 친절이 지나치면 아첨이 되고 부족하면 심술이 된다는 식이다.


이 통제력의 기준은 오직 '시의적절함'이다.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달려드는 무모함이 유일한 '용기'가 된다. 반대로 주변에서 답답해 미칠 만큼 꼼짝하지 않고 버티는 미련함이 가장 지혜로운 '인내'가 되기도 한다.


폭염에는 에어컨 설정온도를 18℃ 맞춰야 시원할 것 아닌가. 중간 지킨다고 25℃에 맞추면 난방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18℃에 맞춰 놓으면 냉방병이 온다. 땀이 식었으면 설정온도를 좀 올려야 한다. 이처럼 중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춤이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과 맥락이다. 전쟁터에서의 무모함은 영웅을 만들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의 무모함은 객기(만용)가 되어 자신과 타인을 해친다. 불의 앞에서의 침묵은 비겁함이 되지만, 분노한 상대 앞에서의 침묵은 가장 큰 인내가 된다. 이처럼 행동의 가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이라는 배경 위에서 끊임없이 변주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말에도 중용에 대한 오해가 숨어 있다. 나는 유행하는 단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한다. 중용 없는 워라밸은 그저 '어중간함'을 낳을 뿐이다.


매일 6시 땡 하면 퇴근해서 기계적인 50:50을 맞추는 것이 워라밸인가? 오히려 일에 집중할 때는 100을 쏟아붓고, 쉴 때는 휴식에 100을 쏟아부어 몰입하는 것이 진정한 균형일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밸런스'라는 단어 자체에 있다. 밸런싱은 건 서로 대등하거나 상충하는 두 대상을 놓고 무게를 맞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Work)'과 '삶(Life)'이 대립하는 관계인가? 아니다. '라이프'라는 거대한 다이어그램 안에 '워크'라는 다이어그램이 포함되어 있다. 부분과 전체를 놓고 밸런스를 잡겠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이다.


일을 내 인생에서 분리하여 저울 반대편에 올려놓는 순간, 일은 내 삶을 갉아먹는 '악(Evil)'으로 규정된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악'과 싸우며 보내는데, 아무리 밸런스를 맞춰 본들 행복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떻게든 일(악)을 빨리 지워버리려는 파이어족이 목표가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는 낙원이 없다.


일은 내 인생의 일부분이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고 '긍정' 해야 한다. 중심 없이 시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욜로, 워라밸, 파이어족, 소비도 경험이다 등 유행하는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냉정하게 나의 언어로 재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낙관을 하며 즐기든, 비관을 하며 개선하든 할 것 아닌가.


자전거를 타는 방법은 관련된 논문을 읽는 것이 아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타보면서 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만용을 부려 실패해 보고, 비겁하게 물러서 후회해 보면서, 비로소 용기와 인내 사이의 미세한 경계선을 감각적으로 익히게 된다.


결국, 수많은 변수 속에서 '딱 맞는 그 지점'을 찾아내는 능력은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 경험에서 온다. 책상 위에서 배운 이론으로는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 위에서 중심을 잡을 수 없다.


중용은 고정된 핀 위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코어근육을 움직이며 무게중심을 옮기는 역동적인 춤이다.


과거를 후회할 필요 없다. 우리가 겪은 극단의 경험들은 낭비가 아니다. 시간을 되돌려 그 경험을 지워버린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깊이 있는 시선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양쪽의 끝을 찍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 내 앞에 닥친 이 상황에서 내가 어디에 서야 할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용을 지키는 삶이란,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삶이며, 매 순간 정답을 새로 써 내려가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과거의 어떤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치열하게 인생의 중심을 잡아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흔들림과 후회 앞에 불안해하지 마라. 다만, 주의할 것은 오직 '지나침'뿐이다.




꼼곰하게 정의해 본 "중용"이란?

양극단을 자유롭게 노니는 여유.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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