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곰하게 정의하는 의무(義務)
덴젤 워싱턴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 <펜스(Fences, 2016)>에는 아버지 트로이가 아들 코리에게 뼈 있는 훈계를 하는 명장면이 나온다. 아들이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그는 답한다.
"남자는 자신의 가족을 돌봐야 해. 넌 내 집에 살고, 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내 침대에서 자지. 그건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야. 그것이 내 책임이니까. 내가 널 좋아해서가 아니라, 너를 돌봐야 하는 게 내 의무(Duty)니까 하는 거다."
의무를 대하는 마음 가짐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좀 더 힘주어 말하면 '해야 되는 것은 그냥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자생(自生)할 수 있다. 자생하지 못하면 '동기부여' 같은 외부 공급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외부에 의존하는 삶은 충만할 수 없다.
고독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다. 고독해도 상관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사체는 광원이 사라지면 같이 빛을 잃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의무를 다하는 것은 나를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축복하는 행동이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는 대부분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 의무를 다하는 것은 나를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시킨다. 개그맨 김영철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았어요.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불편한걸 2-3개 해놔요. 불편한걸 아침에 2-3개 해놓으면, 하루가 길고 재미나고 행복해지더라고요."
또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자신감의 원천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행동이 쌓이면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게 된다. 스트레스 제거와 자신감의 상승, 이 이상의 동기부여가 또 필요할까?
이제 구체적으로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을 통해 이를 짚고 넘어가 보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인류의 도덕을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구분했다.
주인의 도덕을 가진 자들에게 선함은 '자기 긍정'에서 출발한다. 힘, 용기, 고귀함 등 자신의 모습을 선으로 규정하며, 이는 생명력을 강하고 충만하게 만든다.
노예의 도덕을 가진 자들에게 선함은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강자)을 부정하는 것에서 도덕을 찾는다. 강자를 악(Evil)으로 규정하고, 그와 반대되는 겸손, 순종, 근면 등을 선으로 여긴다. 이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적 기제다.
니체는 두 도덕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보았으나, 옳고 그름이 아닌 '생명력의 성장'에서 주인의 도덕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주창한 모습은 노예의 도덕이 가져다준 내면의 깊이(장점)를 이해하되, 수동적인 태도와 원한을 극복하여 주인의 강한 생명력을 회복하는 초인(위버멘쉬, Übermensch)이다.
초인은 가치의 창조자다. 세상이 정해놓은 도덕과 관습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를 부수고(니체의 별명은 '망치를 든 철학자'다)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와 규칙을 창조한다. (내 삶의 의미를 꼼꼼하게 재정의하는 과정 그 자체)
이 관점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들여다보자.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시를 이행한다. 그리고 절차 뒤에 숨는다. 반면 과제 해결을 위해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를 편의상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과 '일이 되게끔 하는 사람'으로 부른다.
심하게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에게는 원한(르상티망)이 보인다. "혼자 잘났지", "승진이 그렇게 하고 싶나?" 하는 식이다. 과제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뾰족한 인재를 가져다 놓고 정을 때려버린다. 그러곤 "원래 모난 돌이 정 맞는 거다"라고 합리화한다. 이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 암묵지)은 구성원들에게 내면화(Internalization)되어 조직에 퍼진다. 지식 경영(Knowledge Management)에서는 이 암묵적 지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를 기업 승패의 핵심이라고 본다. 나선형 발전 사이클의 출발점부터 엉망이 되는 것이다.
모든 지시에는 항상 공백(Gap)이 존재한다. 즉, '권위의 부재(Absence)'가 있다. 이 공백을 대하는 태도로 둘을 극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는데요?", "말씀이 없으셨잖아요."라고 한다.
반면, '일이 되게끔 하는 사람'은 '지시의 공백(Gap)'을 다르게 대한다. 이 공백을 자신의 가치로 채워 넣으려 한다. 상사가 시키지 않은 고민을 하고, 제안을 하여 빈칸을 메우려 한다. 정 안되면 물어보기라도 한다. 권위가 부재한 곳에 자신의 가치를 입법하는 것이다.
다만, 해보겠다는 의지가 있어도 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힐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능수능란하게 공백을 채우기란 쉽지 않다.
처음에는 상사에게 보고를 자주 하면서 배우는 것이 좋다. 브런치 스토리에 작가 선정 메일을 받고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글을 공개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누군가 읽을 것을 염두하고 쓰면 글이 더 좋아진다. 마찬가지로 보고를 염두하고 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훌륭한 훈련법이다. 또한, 누군가를 교육할 목적으로 작성 것도 좋다.
내가 들고 간 자료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상사의 추가 질문을 기록하는 것도 좋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의 시야를 배울 수 있다. 회의 시간에 타 부서의 발표를 듣고 이어질 경영진의 질문을 예상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내가 미리 써놓은 것과 같은 내용을 경영진이 발표자에게 질문할 때 또 은근한 쾌감이 있다.
데이터가 쌓이면 업무시 상사나 경영진의 예상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관련된 추가 자료를 준비하는 것도 연습이 된다. 사내 분위기가 경직돼 있는 편이라 걱정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 번에 보이지 말고 추가 질문이 나올 때 맞춰서 내어 놓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윗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더 알아보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어느덧, 상사와 경영진이 ‘이 과제의 실무영역에서 이 친구가 나보다 고민을 많이 했구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좀 더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 지시의 공백을 매울 수 있게 된다.
초인은 권위의 부재로 만들어진 공백에 자신의 가치를 채워 넣는 사람이다. '일이 되게끔 하는 사람'은 공백(Gap)을 마주했을 때 절차 뒤에 숨지 않는다.
한때 좋아했던 노래, <비전(Vision)>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이고 싶은, 그런 모습의 그 삶을 위하여." 이 말을 니체의 말로 옮기면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가 된다.
니체는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악마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또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수도 없이(셀 수 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새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 모든 생각과 탄식, 그리고 네 삶의 말할 수 없이 작고 큰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와야만 한다."
이 질문 앞에 초인은 답한다.
"너는 신이구나! 나는 이보다 더 성스러운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바로 그 삶이 나의 가치로 입법하여 지켜온 삶임을 선언하는 '아모르파티'의 순간이다.
니체는 이 순간을 삶의 고통스러운 반복조차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거대한 순간(ungeheuren Augenblick)"이라고 했다.
내 삶의 가치를 창조적으로 재정의한다. 그것을 나의 의무로 삼는다. 그것을 지켜 나가는 삶은 고된 삶이 아니다. 생명력을 충만하게 해주는 축복이다.
나의 가치로 입법하여 지켜온 삶은 반복되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랑스럽다. 그런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거창해 보이는 용어에 주눅 들지 말자.
우선, 내일 아침 씩씩하게 출근 하자. 오늘도 나와의 약속을 하나 지킨 것이다.
그리고 점심 먹기 전에 가장 하기 싫은 일부터 하나 끝내보자.
가장 하기 싫은 '의무의 완수'가 "해냈다!"는 기분을 줄 것이다.
그 해방감으로 남은 하루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이다.
그 감각이 하루하루 쌓여 우리를 반사체가 아닌 발광체로 만들어 줄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오전 중에 하나 해치운 당신이 바로 초인이다.
내 삶을 무한히 축복하는 원동력.
스스로 창조하는 가치로 입법하여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