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慘敎育) : 디지털 홍위병.

꼼곰하게 정의하는 참교육(慘敎育)

by 꼼곰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영상들이 있다. 소위 '참 교육'이라 불리는 영상들이다. 무례한 사람이나 범죄를 저지른(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아가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댓글 창을 보면 가관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법이 못 하니 형님이 대신한다", "이게 정의지"라며 칭찬일색이다.


그 영상을 보면 야만스러움에 소름이 끼친다. 그 영상들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언어로 현상을 재정의하기 위해 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인류의 문명은 '폭력'을 다스리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내가 당하면 내가 갚아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룰이었다. 하지만 이는 끝없는 복수의 연쇄를 낳았고, 사회는 불안정했다. 그래서 인류는 합의했다. 개인이 가진 무력을 모두 거두어들이기로. 대신 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오직 '국가'에게만 독점시키기로 합의한다.


17세기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이 거대한 국가 권력을 전설 속 괴물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비유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빠져 파멸할 수밖에 없다. 이 공멸을 막기 위해 우리는 '사회계약'을 맺었다. 개개인이 가진 야만적인 칼을 내려놓고, 그 모든 폭력의 권한을 절대적인 존재에게 양도하여 질서를 만든 것이다.


그 계약에 따라 나라 밖의 적에 대한 폭력은 군대가, 나라 안의 범죄에 대한 폭력은 경찰과 사법부가 독점한다. 즉, 이 권한은 우리 공동체 구성원의 합법적 위임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심지어 국가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도 우리는 더 이상 곤장을 치거나 주리를 틀지 않는다. 신체적 고통을 주는 야만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배제(수감)하는 방식으로 문명화되었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참 교육' 영상은 이 문명의 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그들은 '합의된 야차룰'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변호사를 대동해 폭력을 생중계한다. 문명사회는 이것을 '사적 제재(Lynch)'라고 부르며 엄격히 금지한다. 그런데 대중은 여기에 열광한다.


이 광경을 볼 때마다 이웃 나라 중국의 아픈 역사가 떠오른다. 중국은 본래 찬란한 문명을 가진 대국(大國)이었다. 제자백가의 철학은 깊이가 있었고, 성현들은 품격이 있었으며, 황제는 조공을 받으면 40배로 갚아주는 아량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대에 들어 이 모든 유산을 스스로 불태웠다. 문화 대혁명, 그 선두에는 잘못된 사상에 취한 '홍위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붉은 완장을 차고 인민들을 선동해 지식인을 끌어내고 인민재판을 열었다. "저놈은 반동이다!"라고 외치며 문명의 가치를 짓밟았다. 그때 그 홍위병들을 묘사한 문헌을 보면,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네가 뭔데?"


지금 유튜브 속의 참 교육 자경단과 그들을 응원하는 댓글 창이, 내 눈에는 그때의 홍위병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상을 찍어 올리는 유튜버는 온갖 정의로운 척을 하며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양 천명한다.


붉은 완장이 카메라와 구독자 수로 바뀌었을 뿐이다.


냉정하게 묻자. 그들에게 심판의 권한을 준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단 한 번도 폭력의 권한을 조회수에 눈이 먼 그들에게 위임한 적이 없다. "도대체, 네가 뭔데 감히 이런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있나?"


더욱 소름 돋는 것은 그들을 옹호하는 대중이다. 디지털 홍위병에게 선동되어 "죽여라! 패라!"를 외치는 댓글 창은, 광장에 모여 이성을 잃고 소리치던 우매한 인민재판의 군중과 겹쳐 보인다. 현대 중국에서 "내가 왕년에 홍위병이었소"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노인은 없다. 그 광기는 역사의 수치로 남았다. 지금의 이 참 교육 열풍도 머지않아 우리의 부끄러운 흑역사가 될 것이다.


그들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인류가 피의 대가로 쌓아 올린 '법치'라는 시스템을 무시하는 야만인이다.


"법적으로 문제없지 않냐", "오죽하면 그러겠냐"라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파렴치한들과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 탓에, 사회는 불필요한 규제와 감시를 또 만들어야 한다. "하지 말라는 법 있어?"는 "하지 말라는 법"을 만든다. "사적 제재 금지"는 강화될 것이다. 또 화가 나는 것은 그에 따른 행정력 낭비와 사회적 갈등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모두가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만인들이 설치는 것을 방치하고 심지어 그들을 옹호해서 치러야 하는 우리의 사회적 비용(Social Cost)이다.


그 소수의 파렴치한 야만인들은 우리 사회 모두가 치러야 하는 비용을 가불 해서 자기 주머니에 넣고 있다.


자극적이라서 재미있고, 남들이 다 환호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류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동의해야 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이것은 참(眞)교육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참(慘, 참혹한)교육일 뿐이다.


화려한 액션과 사이다 발언 뒤에 숨겨진 '야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때려눕히는 영상에 "속 시원하다"라고 댓글을 달기 전에, 한 번쯤 차갑게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합의한 문명을 파괴할 권리를,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주었는가?“




꼼곰하게 정의해 본 "참 교육"이란?

정의(Justice)의 탈을 쓴, 디지털 시대의 야만적 인민재판.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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