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子女) : 부모가 세상에 던지다.

꼼곰하게 정의하는 자녀(子女)

by 꼼곰

자녀는 부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한량처럼 살던 이도 초음파로 들려오는 태아의 심장 소리에 성실한 생활인으로 변하고, 예민하기 그지없던 사람도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인자하게 품어 안는다. 자녀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녀를 관습적인 틀이 아닌 '나만의 언어'로 반드시 정의해 보아야 한다.


"가족이니까 당연하다.",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상투적인 생각은 위험하다. 자칫하면, 부모와 자녀 모두를 고통의 굴레에 가둔다.


또한, 그러기엔 다른 어떤 관계보다 자녀와의 관계는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난이도가 높다.


자녀는 외면하기 힘들다.

타인의 고통은 때로 외면할 수 있지만, 자녀의 아픔은 사소한 것조차 외면하기 힘들다. 우리의 본능이 그렇다. 비 오는 날엔 짚신 장수 자식을, 맑은 날엔 우산 장수 자식을 걱정하는 노부모의 마음처럼, 자녀의 어려움은 외면하기가 힘들다. 때론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관계는 외면하면 그만일 수 있지만, 자녀는 안 보고 살면 그 자체가 더 큰 고통이 되는 존재다.


내 자식이라고 해서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한다.

자녀가 성장할수록 부모와 공유하는 시간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다. 우리 역시 일터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르듯, 자녀에게도 부모가 모르는 고유한 세계가 있다. 우리가 "다 안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자녀는 부모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자녀는 결코 부모의 바람대로 살지 않는다.
새벽에 잠들었으면 하지만 등에 센서가 달렸는지 자리에 눕히기만 하면 울기 시작하고, 책을 많이 읽기 원하지만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않는다. 내신 등급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으면 하지만 아이는 게임 승급 전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나" 싶겠지만, 누굴 닮았겠는가? 생각해 보라. 당신도 그랬다.


또한, 자녀에게 나의 바람을 강요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바라는 '유용한 것'들이 정말로 유용한지 검증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학창 시절에 영상을 편집하는 기술로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는가? 불과 몇 년 전 불었던 코딩 교육 열풍은 또 어떠한가? 부모의 경험치는 늘 시대의 변화보다 느리며, 우리가 옳다고 믿는 길은 자녀의 세대에선 막다른 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우선 물어보자. 자녀는 어떤 존재인가?


"나의 분신."

"자식이 뭐길래."

"내 인생의 전부."

"자식이 원수다."


이런 상투적이고 지협적인 말이 아닌, 자녀의 존재 그 자체는 무엇인가? 우선, 이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존재에 걸맞은 입장을 갖출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탄생을 "청탁 없이 세상에 던져졌다.(존재의 피투성, 被投性, Geworfenheit)"고 표현했다. 이 말에 의하면, 아이는 스스로 원해서, 부모에게 던져달라고 요청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마치 투수의 손을 떠난 야구공처럼 이 세상으로 던져졌을 뿐이다.


그리고 자녀를 이 세상 던져 놓은 주체는 부모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자녀를 온전히 길러내야 할 마땅한 의무가 있다. 이것을 '희생'이라 부르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희생은 보상 심리를 낳고, 보상 심리는 자녀의 삶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자녀를 던진 이곳이 무한한 즐거움만 가득한 유토피아였다면, 우리는 자녀에게 신처럼 숭배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은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곳이다. 우리는 세상의 고통을 빤히 알면서도 아이를 이곳에 초대했다. 자녀는 부모에 의해 이 낯선 세상으로 강제 초대된 '귀한 손님'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그가 이 거친 환경에 잘 적응하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호스트(Host)'가 되어야 한다.


좋은 호스트는 손님에게 문을 활짝 열어두지만, 동시에 그 집에는 벽이 있다. 벽이 없는 집은 집이 아니라 광야다. 아무런 조건 없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가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아이에게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을 권리도 있다.


경계를 경험해 본 아이만이 자기 안의 경계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의 환대는 이중적이어야 한다. 한 손은 열려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울타리가 있다. 열린 손은 아이의 고유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준다. 울타리를 든 손은 아이가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며, 세상의 규칙을 안전한 환경 속에서 먼저 연습하게 한다.

울타리의 크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울타리는 점점 넓어지고, 결국 아이 스스로가 자기만의 울타리를 세우는 날이 온다. 그날이 오면 부모의 역할은 호스트에서 이웃으로 바뀐다. 나아가, 자녀가 독립을 하는 시기가 오면 그 발걸음을 축복해 주면 된다. 그리고 계속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울타리를 가꾸면 된다. 나아가 나의 행복을 위해 잘 가꾼 그 울타리는 이곳이 그리워 이따금 찾아온 자녀에게 훌륭한 쉼터가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의무'는 결코 죗값이 아니다. 진정한 양육은 '응답할 능력(책임, Responsibility)'을 발휘하는 과정이다. 내가 세상에 내놓은 존재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고(Response), 그가 온전한 인격체로 설 수 있도록 나의 능력(Ability)을 다하는 것이 부모의 소임이다. 죗값을 치르듯 자기를 깎아내리는 육아는 부모를 지치게 하고, 자녀를 부담스럽게 만들 뿐이다. 부모라는 책무에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부모가 행복해야 비로소 자녀를 온전한 존재로 환대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자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의 행복을 위한 이야기이다.


다만, 양육 안에서의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다.


새벽 수유의 피로,
사춘기 자녀와의 충돌,
독립해 떠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쓸쓸함.


이 모든 것이 고통이면서 동시에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충만감이 양육에서 추구해야 할 행복의 정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이 힘듦에는 의미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부모는 지치지 않는다. 또한, 나의 가치로 입법하여 지켜온 삶은 반복되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랑스럽다(Amor Fati). 자녀를 향한 나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내 삶을 축복하는 행위다.


예고 없이 안기는 아이의 품,
불쑥 건네는 "아빠(엄마), 사랑해.“ 라는 한마디,
자기 힘으로 세상에 서 있는 자녀의 뒷모습.


이처럼, 부모가 자녀로부터 받는 구원은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선물의 형태로 온다. 자녀는 우리가 원하는 데로 살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환대란 결국,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어줌 자체가 이미 충분한 의미인 것을 아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양쪽 모두가 각자의 실존을 긍정하며 행복할 때, 비로소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은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다.




꼼곰하게 정의해 본 자녀(子女)란?

부모의 초대로 세상에 온 귀한 손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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