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9월 매일 하나의 질문에 대답하자
아주 오랜만이다. 한참 전부터 여름 하이킹에 대해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도무지 끝이 안 난다. 내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빨리 마무리해서 올려야 하는데 이미 너무 길고 써야 할 내용이 한참 더 있어서 착잡하다. 8월, 9월에는 컨셉진 스쿨의 '인터뷰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 때문에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을 뿐 계속 글을 쓰긴 썼다. 매일 나를 알아가는 질문 하나씩을 받고 답변을 적어서, 일정한 분량을 채우면 전부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다. 10월 첫째 주까지 그 프로젝트를 마감하느라 블로그에 올릴 글을 따로 쓸 시간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마감 기한이 있는 일을 하려니까 스트레스 받았는데 덕분에 심각한 상태였던 '글손실'을 약간 회복한 것 같다. 역시 고통 없는 성취는 없는 것인가!
올해 여름은 밝고 따뜻한 날씨를 즐길만한 에너지가 없어서 거의 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경미한 우울증이라는 자가진단을 내리고 심리 상담을 받고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노트북 카메라를 쳐다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리프레시를 위해 팀을 옮기기로 했고 2주 전부터 새 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 수련을 하다가는 어깨가 안 좋아져서 또 마음고생을 좀 하고... 그런 여름이었다.
스웨덴은 9월 말부터 팬데믹 관련 규제가 풀려서 일주일에 2~3일씩 회사로 출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나아졌는가? 잘 모르겠다. 팬데믹 이후로 팀 구조와 일하는 방식이 너무 달라져서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고 예전만큼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 가끔 집에서 일하는 게 차라리 편하고 좋지 않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우울증 이야기를 했을 때 가족들이 오랜 재택근무 때문이라고 출근하기 시작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어떤 위로도 안 되고 믿지도 않는다. 우울은 항상 있었고 터져 나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재택근무가 그 시기를 앞당기는 일에 큰 공헌을 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아마 언젠가는 우울을 알아차려야 했겠지.
아무튼. 두 달 동안 썼던 인터뷰 프로젝트에서 일에 대한 답변 다섯 개를 추려서 올린다.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공부만큼 재밌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나요?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무엇인가요?
에세이와 기술 분야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요. 취미로 블로그에 글을 쓰고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 프로젝트도 글 쓰는 연습 하려고 시작했거든요. 처음에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막 스웨덴에 있는 회사로 이직했을 때 혹시 내 경험을 글로 쓰면 사람들이 궁금해할까? 이런 반신반의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마음잡고 글을 쓰는 게 처음이다 보니까 마음에 드는 글 한편을 완성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정말 드문드문 발행하고 있는데요, 꾸준히 구독해 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메일을 받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어서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블로그를 통해서 웹진에 인터뷰도 했는데, 그 글을 보고 연락이 닿아서 지금은 친구가 된 분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계속 글을 쓰고 싶은데 지금보다 더 잘 쓰기 위해서 각 잡고 배울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직업의 연장선에서 기술 글쓰기도 해보고 싶은 분야인데, 이쪽은 목적이나 독자층이 확실하고 제가 개발자로 일하고 있으니까 혼자 블로그를 쓰는 일과 다를 것 같아요. 에세이는 대나무 숲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듣는거라면 기술 글쓰기는 읽을 사람을 앞에 두고 원하는 내용을 알려줘야 하는 거잖아요. 또 지금 영어로 일하고 있으니까 영어로 유창하게 쓸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은 어떨 때 슬럼프가 오고, 그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요?
뭔가를 계속하고 있는데 성취감이 없고 의미 없는 노력 같을 때 힘들고 특히 일이나 요가가 발전이 없으면 무기력해져요. 이 두 개가 제 삶의 가장 큰 동력이거든요. 실패도 힘든 경험이지만 오기가 생기고 실패를 다잡는 새로운 목표라도 생기는데, 끝없는 평행선을 지나는 기분이 들면 막막하더라고요. 저는 일단 저한테 선물을 하나 사줘서 기분을 환기시킨 다음에 힘든 순간을 지날 때까지 그냥 계속해요. 보통 계속하는 것 밖에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막막한 기분도 지나가고 결국 뭔가를 성취하고 있더라고요.
언젠가 요가 영상에서 보고 적어두었던 말이 있는데... 힌두교에 우주를 창조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파괴하는 세 명의 신*이 있는데,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비슈누가 셋 중에 제일 일을 열심히 한다는 말이었어요. 너무 당연하지만 뭐든지 유지가 제일 어렵잖아요. 그래서 발전을 느끼지 못할 때는 유지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봐요. 그동안 너무 잘 해와서, 너무 많이 성장해서 유지도 덩달아 점점 어려워지니까요. 그럼 어제랑 똑같은 것 같아도 한 번 더 해 볼 힘이 생겨요.
* Brahma(브라흐마) - 창조 / Vishnu(비슈누) - 보수와 유지 / Shiva(시바) - 파괴와 재생
지금 당신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 중단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관성처럼 일하고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만 일하는 태도를 버리고 싶어요. 계속 배우려는 의지가 많이 사그라든 것 같아요. 회사에 계속 들어오는 어린 친구들이 새로 제시하는 아이디어들을 보면서 많이 생각해요. 기술은 계속 변하고 그걸 계속 시도해보는 것이 제 직업의 덕목 중 하나인데요. 뭐든지 계속 변하는 와중에 변하지 않는 핵심 진리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경험이 많으면 새로운 기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감으로 많은 부분을 유추할 수 있어요. 그동안 공부에 게을렀던 저는 이 방법으로 회사에서 살아남았는데, 여기에는 경험이라는 한계 변수가 확실하기 때문에 제 곳간이 너무 금방 털리는 거예요.
그래서 잘 몰라도 대충 넘어가는 게으른 마음을 중단하고 다시 부지런한 지식 노동자로 돌아가야죠. 기술이 계속 변하는 것 같아도 결국 그게 그거인 것 같아서 지겨워서 쉰다는 것이 관성으로 굳어졌던 것 같아요. 어차피 똑같을 거야... 하루 맘잡고 읽으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고 절대 맘잡은 하루를 계획하지 않는 제 등짝을 팡팡 쳐야 합니다 ^^! 오래 쉬었으니 공부할 내용이 많아서 좋다고 생각하려고요. 하나 더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신입 친구들이 아는 내용을 저만 모르면 쪽팔리고 기분이 살짝 안 좋아요. 자주 그런 기분을 느낄 게 아니라 같이 배우고 알아가는 즐거움을 자주 느끼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일과 회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의 너무 많은 부분을 정의하는 것 같아요. 창의력, 자존심, 자부심, 동기, 도전, 사회성, 독립, 경제력 등을 일과 회사에서 찾아요.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고 또 그런 환경에 계속 있으려고 노력하고요.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삶의 원동력이었고 지금 직업을 가능한 한 오래 하고 싶어요.
여기까지는 거의 일에 대한 이야기고, 해외에서 살아보니까 회사가 제 삶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던 사회적 혜택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제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세금을 내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라는 것을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모든 사회적 보호는 기본적으로 세금을 내는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소득만큼 세금을 낸다는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를, 우리나라에서는 제가 한국 국적이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더라고요.
그런데 일과 회사가 저의 전부일 수는 없잖아요. 일이 잘 안되니까 삶이 다 엉망이 되는 경험을 해보니 너무 일과 삶 사이에 브레이크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요즘 일에 두는 의미를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요, 마음속에서 저의 뿌리 깊은 성공에 대한 욕망과 계속 싸우는 중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포기는 무엇인가요?
전 회사를 다니면서 미국 유학을 준비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든 해외로 나가서 회사를 다녀보고 커리어를 다지겠다는 의지가 엄청 강했거든요. 그래서 주말 GRE 학원도 다녔었어요. 주말에 아침 일찍부터 반나절 동안 학원 수업을 들으면 혼자 공부할 거리가 산더미였어요. 그래서 평일에 퇴근하고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어요. 출근하기 전에 스타벅스 열자마자 들어갈 때도 있었고 회사 점심시간에도 영어 단어를 봤던 것 같아요. 10시까지 야근하고 도서관 문 닫는 시간까지 앉아있을 때도 많았는데… 남들은 하루 종일 공부해서 한두 달에 끝내는 시험을 저는 하루에 길어야 세 시간밖에 못 하니까 몸만 힘들고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주말에는 쉬지도 못하고 학원 가서 또 숙제를 한가득 받아오고요. 회사 일이 거의 반으로 줄어야제대로 해 볼 에너지가 남을 것 같았는데 그것보단 퇴사가 확실했겠죠? ㅎㅎ 그런데 제가 유학 가려면 돈이 더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유학 준비를 못 하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유학 준비를 포기했어요.
대학을 다니면서 한 번 포기해 봤기 때문에 유학은 여태까지 총 두 번을 포기했네요. 저는 결정하면 미련을 안 두는 편인데 유학은 아직도 가끔 생각할 정도로 항상 마음 한편에 남아있어요. 왜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운명적인 끌림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유학을 가고 싶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부러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일단 돈 문제가 있었고 가족의 희생이 필요했거든요. 모든 것을 감내하고 추진한다고 해도 결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자유로운 상황에 대한 갈망이 자꾸 포기한 결정을 되돌아보게 하는지도요.
October 17 2021
#개발자 #해외취업 #스웨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