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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자 꿀 May 05. 2022

그녀의 서사의 출현

긴 글을 쓰는 이유

올해는  내가  글과 직접 찍은 사진을 종이책으로 만들 생각이다. 얼마 전부터 아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적어도 십만 자가 넘어야 책이 볼만하다고 해서 예전에 올렸던 내용  하나를 새로 써봤는데,  하나가 오천자가 되는  까지는 성공했지만(기록 경신) 구성이 너무 맘에  든다. 본론은 간단한데 빌드업이 너무 길고 자기들끼리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 어디는 너무 설명 충인  같다가 어디는  후루룩 지나가버리고그리고 너무  꿈을 안고 글을 시작한 이유 때문인지 처음 썼던 글의 좋은 점이 없어진  같은 느낌마저 들더라.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쓰고 계속 수정을 반복하다가 발행했는데 글이 길어지니까 맘대로   된다. 원래 그런 거겠지? 흑흑 원래 그런 것일 거야…. 이게 바로 창작의 고통…. 그러니까 아마 오천 자짜리 글은 날려버릴  같다.


처음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스웨덴에 왔는데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다. 평일은 저녁까지 어리버리하게 하루를 보낸다 쳐도 주말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약속도 거의 없고 요가원에 나가는 일 빼고는 도무지 할 일이 없었다. 집안일을 하고 덕질을 해도 시간이 남았고, 넷플릭스 정주행은 원래 잘 안 한다. 그래서 이직 준비했던 내용을 거슬러 올라가 몇 개의 글을 쓰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약속도 많지 않으므로 ㅎㅎ 쫌쫌따리 이것저것 쓰고 있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스웨덴에 오기 훨씬 오래전부터 했던 것 같다. 그냥 내 마음속에 항상 있는 생각 중에 하나였다. 다만 그것이 기술 블로그는 아니었다. 그것보다 좀 더 개인적이고 이야기가 있는 글, 가능하면 기술에 대한 내용보다 살짝 더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Joel Spolsky이 쓴 Joel on Software라는 책이 있는데 기술적인 내용을 쓰자면 이런 형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묶어서 발간한 것으로, 기술적인 내용부터 개발자로 일하는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원서는 2004년에, 우리나라 번역본은 2005년에 나온 기술서치고 꽤 오래된 책이지만 아직까지 리뷰가 달릴 정도로 고전이고 나머지 블로그 글을 묶어서 4년 후 두 번째 책이 나왔다. 나는 첫 번째 책 번역본을 빌려서 읽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원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이디어를 강하게 부추긴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아닐까 한다. 여자이고 개발자이면서 해외에서 일을 하고 미혼이고 30대인 사람의 이야기도 누군가 궁금해하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누군가가 날짜와 계절을 정확히 꼬집어서 1868년 4월 5일과 1875년 11월 2일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그녀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언제나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접시와 컵들을 닦았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사회에 나갔습니다. 그 모든 일에서 남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사라져 버렸지요. 어떠한 전기나 역사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그럴 의도는 없더라도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하지요.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내가 그동안 해온 글쓰기가 하루에 일기 한 장 채우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글감 하나를 완성된 글로 만들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어서 계속했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 글쓰기는 위로하고 위로받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신기하고 가끔 달리는 댓글도 고마웠고… 그리고 나 자신한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힘든 순간을 글 하나로 마무리해서 그 자리에 남겨두고 앞으로 다시 전진하는데 힘이 되었고, 문득 뒤돌아볼 때 그때의 내가 사진 찍듯 남겨놓은 자취가 위로가 될 때도 있었으며,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


사실 유튜브가 monetization이 잘 되다 보니 똑같은 시간을 북유럽 감성감성한 ‘스웨덴 개발자 브이로그’ 같은 것을 만들었다면 약간의 돈은 벌었을지 모르겠으나 지나가는 일상 장면 장면을 모으고 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내가 많이 쑥스럽고 취향이 아닌 것 같다. 대신 글이라는 간접적인 매개체를 사이에 두고 글 뒤와 그 너머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낭만적이지 않은지.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북유럽 감성감성하고 시각적인 내 일상이 아니라 그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고민하는 것들,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관통하는 어떤 생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거창한 것을 쓸 만한 능력은 아직 안됨.


글쓰기를 연습하면서 느낀 것은 글자는 생각보다 머릿속 생각에서 손 끝으로 (연필로 쓰던 타이핑을 하던) 술술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내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소모적인 작업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생산적인 취미이기 때문에 성취감이 있고 연습을 해두면 일상의 어딘가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 한글은 심미안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글자이면서 섬세한 언어라는 것 또한. 비록 이런 섬세함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시험에 들게 할 때도 있지만. 나처럼 많은 시간을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한국어 단어 사전을 유지하는 데 능동적인 글쓰기만큼 효과적인 일이 또 없다.


글쓰기가 내 개발자라는 직업에 어떻게 도움이 되냐 하면, 늘 생각하지만 코딩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쓰냐의 차이일 뿐 글쓰기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지금 하는 글쓰기와 코딩 글쓰기가 특히 가깝게 맞닿아있는 부분은

1)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

2) 남이 읽는다.

3) 나중에 누군가가 다시 읽는다.

이렇게 세 가지라고 본다. 특히 개발자들은 작성하고 있는 코드가 언제든지 제3자에게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머리 한편에 두고 미래의 모님께 친절한 코드를 쓰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는데, 그 과정이 비밀노트에 끄적였던 자투리 생각을 정리하여 남에게 보여주는 행위 - 즉 다양한 방식으로의 출판을 위해 들이는 품처럼 보이는 것이 재밌다. 또 개발자들은 상당한 양의 사람 대 사람 의사소통을 하고 일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서를 쓰게 된다. RFC(Request for Comments)를 쓰는 문화가 나타난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든 일에는 글쓰기가 바탕이 된다. 나만해도 오늘 아침에는 두 장 짜리 문서를 썼고 오후에는 회의를 하고 남의 코드를 읽고 메신저로 질문을 하면서 보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여러분 스스로 충분한 돈을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책을 만들 정도의 글자 수를 뽑으려면 거의 4년을 채워가는 스웨덴 생활과 20대 후반부터의 개인사를 전부 쥐어짜야 할 것 같다. 무한 즙 짜기... 우선 글을 열심히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이책을 받기 전까지 바른 마음가짐(!)으로 착하고 잘 살아야지. 여태까지 살아온 것은 바꿀 수 없으니까 솔직하게 글로 남기고 회고하며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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