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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자 꿀 Dec 03. 2023

잔디밭 예찬

(제목은 제가 지은 제목 대신 다른 분이 수정해주신 것을 씁니다. 감사해요)


스톡홀름을 걷다보면 크고 작은 공원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왕실에서 정원으로 쓰던 공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바다가 보이는 공원, 야트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진 공원, 중앙에 작은 성당이 있는 공원까지. 조깅을 하거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 곳. 여름에는 비키니를 입고 누워서 태닝을 하는 사람들과 눈이 쌓인 겨울에는 썰매를 탄 아이들로 복작거리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지어진 도심 사이사이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공원들.


처음에 스톡홀름에 와서 길을 익히러 돌아다닐 때부터 도시가 푸르고 예쁘게 가꾸어져있고 특히 잔디밭이 이곳저곳에 많다는 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한국의 공원과 다른 점은 단연코 넓은 잔디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공원은 산책로를 강조해서 길을 넓게 내고 길 사이의 남는 공간에 나무나 잔디를 심는 것이 흔하다. 반면에 스톡홀름에서 보통 볼 수 있는 공원들은 땅을 사용하는 방법이 아주 관대하여 잔디밭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잔디가 깔린 땅이 상당히 넓다. 그리고 잔디밭 군데군데 아주 오래된 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넓은 땅의 구역을 나누듯이 산책로가 나있다.

이런 공원에는 시멘트 바닥 위에 어설프게 만든 것이 아닌, 땅을 정원의 형태로 오랫동안 유지해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공원이 시작되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눈 앞으로 펼쳐지는 초록색의 평지가 도시의 소음을 차단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원 주변으로 차가 다니고 건물이 서있는데도 공원은 그것들과 갑작스럽게 단절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따지고보면 도심 사이의 얼마 안되는 땅이지만, 이 구역을 걷고 있을 때 만큼은 눈 앞의 넓은 잔디밭과 건물보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에 숨어 나는 잠시간 진짜 자연 속에 있다.


한국에서 살 때 전형적인 유럽 사람들 하면 일단 날씨가 좋은 날 잔디밭에 누워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부터 생각이 났다.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하는 일광욕에 로망이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해변보다는 공원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아름다운 색깔, 막 깎은 잔디에서 나는 특유의 싱그러운 냄새와 푹신한 촉감 등 공원에는 나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특히 식물이 자라는 땅 위에 벌러덩 눕는 행동은 자세가 편하기 때문인 것과 별개로 땅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기 때문에 느끼는 특별한 행복이 있다고 늘 생각했다.


아쉽게도 서울에서 내가 기억하는 잔디밭 위에 누울 수 있는 곳은 한강공원이 유일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잔디는 관상용 식물에 가깝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감상해야 하는 귀한 분들이시다. 요즘에는 피크닉이나 도심 캠핑이 흔해지고 잔디밭에 들어갈 수 있는 공원들이 많아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잔디밭에 걸어들어가는 것은 잔디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었다. 잔디가 예쁘게 깔린 공간 앞에 들어가지 마시오 같은 팻말이 있거나 심지어 낮은 울타리를 친 곳도 있었다. 그래서 아쉽게도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영역은 흙바닥 아니면 시멘트 바닥 뿐이었다.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는 무덤에 잔디 포장을 하고 나머지 땅에는 잔디를 거의 깔지 않는다. 고궁을 가보면 건물 사이의 공터가 흙바닥인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또 잔디가 자라는 조건이 서양과 우리나라가 많이 다르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너무 추웠다가 너무 더워지는 날씨와 겨울에 땅이 꽝꽝 어는 특징 때문에 잔디가 자연적으로 잘 자라기에는 혹독한 환경인 것이다. 반면 유럽은 사계절의 기온차가 심하지 않고 습도도 일정해서 한국보다 많은 관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런 이유에서 보면 꽃을 꺾지 말라고 가르치듯 잘 자란 잔디를 일부러 밟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전혀 안되는 것은 아니다.



공원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아름답지만 잔디밭이 가장 좋은 때는 단연코 여름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7월에는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무조건 공원에 갔다. 스톡홀름은 여름이 짧은데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을 빼면 안 그래도 짧은 여름 중에 남는 날이 그닥 많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되는대로 최대한 많이 나가야 한다. 오늘 낮에는 잔디밭에 앉아서 햄버거 세트를 먹었고 저번주에는 비치타월 위에 누워서 책을 썼다. 작년에는 공원에서 뜨개질을 많이 했다. 공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나처럼 혼자 나와서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단체로 와서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한 무리들도 있다. 정말 즉흥적으로 온듯 바닥에 그냥 누워 자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돗자리와 마실 거리 등을 야무지게 챙겨오기도 하고.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있으면 햇빛이 가장 직사광선으로 드는 곳에 자리잡아 입고 온 옷도 벗어던지는 사람들도 보인다.


내가 스톡홀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원은 훔레고든(Humlegården)이다. 스톡홀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원으로, 17세기 초에 왕실에서 쓸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려고 작은 농장을 만든 것이 시초다. 훔레(humle)는 스웨덴어에서 홉이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홉 정원’이 되는데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홉이 오래전에 여기서 많이 자라는 식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18세기에 대중에게 처음 문을 개방한 후 공원 중앙에 왕립 도서관을 짓고 리노베이션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훔레고든을 좋아하는 이유는 왕실 농장에서부터 공원까지 유지된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한 큰 나무들과, 역시 시원하게 깔린 잔디 때문이다. 공원의 한 쪽에 약간의 경사가 있는데 멀리서 보면 평평하게 시작된 초록색의 땅이 나무들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뻗어 나가는 것 처럼 보여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공원이 넓기 때문에 중앙으로 들어가면 눈 앞에 보이는 잔디밭과 나무들에 가려 주변 도심과 상당히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훔레고든이 위치한 곳은 높은 빌딩이 거의 없어서 시야가 나무, 땅과 하늘로 꽉 채워진다.


훔레고든은 내가 다니는 요가원과 가까워서 오며가며 지나다닐 일이 많았다. 일요일 아침 수업이 끝나면 공원에 들렀다가 이른 점심을 사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주말 일과중에 하나였다. 처음에는 공원에 혼자 앉아있기가 조금 민망했다. 주말 아침에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전부 여기에 속하는 것 같은데 나만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분은 아직 관광객 같은데 관광을 하러 갈 곳도 함께 할 친구도 없는 것이 허전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도 요가원에 가려고 주말마다 밖으로 나갔고 끝나면 일단 훔레고든으로 갔다. 몇 번이 지나자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보고 노래를 듣기 시작했고, 등 뒤로 깔린 푸른 잔디와 눈 앞의 새파란 하늘을 둘러보며 행복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 쯤 스톡홀름에 사는 일에 비로소 익숙해졌던 것 같다.



잔디밭은 공원까지 일부러 찾으러 나가지 않아도 된다. 2년 째 살고있는 지금 동네는 집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방향으로 넓게 잔디가 깔린 땅이 있다. 그 주변으로는 나무들이 빼곡한데 아파트를 지을 때 원래 있던 나무들과 건물 사이에 남는 공간에 잔디 포장을 한 것 같다. 이번주에는 한 가족이 잔디밭에서 파티를 했고, 그 밖에 잔디밭에 자주 나와있는 주민들이 몇 명 있다. 캠핑 의자를 가지고 나와서 책을 보는 분과 강아지 두 마리와 같이 나와서 오후 내내 웃통을 벗고 앉아있는 남자분이 바로 떠오른다. 그 남자분은 재택근무를 할 때마다 일광욕을 하고계셔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인가 싶어 속으로 부러워하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파트 주변 잔디밭은 실용적인 가치가 별로 없다. 게다가 앞서 말한대로 날씨 때문에 잔디가 죽지않고 계속 자라는 것일 뿐 일부러 잡초를 뽑거나 잔디가 죽은 부분을 메우는 노력을 하지 않으므로 관상용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하다. 잔디밭은 노는 땅이다. 하지만 모든 자연이 그렇듯 그것 자체로 가치가 된다. 비어있는 것 같지만 꽉 차있는 땅. 하루종일 그 땅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잔디밭을 집에서 내려다보는 누군가는 나처럼 하루에 한 번 푸르른 땅이 예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잎사귀를 예쁘다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그 땅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은지.

이것은 좁은 땅에서 비좁게 모여사는 우리나라에서는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주택단지의 미관이다. 남는 땅은 주차장으로 양보하거나 작은 건물 하나라도 올려서 써먹어야 하니까. 전부 이해는 가지만, 한국의 아파트를 갈 때마다 사방이 시멘트로 채워진 아파트 단지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집 주변에 잔디밭 하나 없다고 인생이 그다지 달라지진 않겠지만, 분명히 그 존재로 받는 위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잔디밭에 누워있기가 실제로 해보면 마냥 편안한 것은 아니다. 하루종일 해가 나는 날씨에도 잔디 속에 숨었던 습기가 조금씩 올라와서 피크닉 매트가 없으면 옷이 살그머니 축축해지기 때문이다. 또 앉아도 엎드려도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미세한 경사하며. 그래도 사람들은 햇빛과 좋은 날씨를 온몸으로 환영하며 몇 시간씩 공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해변에 가듯 옷 속에 비키니를 입고 공원에 오는 사람들이 재밌다고 생각했지만, 어둡고 기나긴 겨울을 두어차례 보내고 나니 나도 저절로 햇빛에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민소매를 입고 팔이라도 태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 텐트다. 살을 태우기 싫어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딱 맞는 문화인 것 같긴 하지만 스웨덴에 산다면 마땅히 햇빛을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은 날 잔디밭에 누워있으면 이 기분을 말로 만든 것이 바로 평화라는 단어인 것만 같다. 이렇게 예쁜 여름을 위해서 길고 어두운 겨울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의 봄, 초여름 같은 날씨와 새파란 하늘은 겨울을 지낸 사람들에게 보상을 확실하게 해주고 간다. 깨끗한 하늘과 맑은 공기가 만드는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이면 나뭇잎 사이로 금가루가 떨어지는 것처럼 부서지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을 평화가 아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공원에 누워 하늘이 파랗고 나무는 초록색이라고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원색의 색깔을 눈에 새겨넣으며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날씨가 잠깐이면 지나가는 것이 불행할 정도로 평화롭다고.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좋은 날씨 덕에 하루라도 더 많이 잔디밭에 누울 수 있다면 좋겠다.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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