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설이 이틀 뒤로 다가왔다. '코로나 19'로 내려진 조치 때문에 이번엔 가족들의 만남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작년 추석에도 그랬지만 명절 대이동이라는 일련의 행사도 잠시 멈춤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아쉬운 분들이 많을터이고.
우리네 명절 대이동도 대단하지만 중국의 '춘절' 대이동은 차원을 넘어선다고 한다. 워낙에 대륙이 넓다 보니 이동하는데만 며칠씩 걸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대이동'인 것이다.아무튼 우리와 중국의 대이동이 올해어떤 식으로든 모양새가 달라질 거 같긴 하다.
설날이 다가와서인지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영화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춘절의 대이동으로 시작하는 영화 '먼 훗날, 우리' 다. 시간적인 배경이 바로 '춘절'이니 이맘때쯤 보게 되면 조금 더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이웃나라 명절 풍습도 엿볼 겸 골라봐도 좋을 것이다. 원작 소설은 류뤄링의 '춘절, 귀가.' 다.
■대도시에서 가난한 청년으로 살아가는 법. 춘절, 고향의 의미.
영화는 두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교차 기법으로 사랑의 상실이 주는 아픔을 더 극대화하려 한다. 사랑이 주제인 영화에 그들의 '춘절 귀향'은 적절한 소재로 쓰인 것이고. 과거 우연히 고향, 야오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만나게 된 첸칭과 샤오샤오, 두 사람은 각각 대학생과 치열한 사회인의 삶을 베이징에서 살고 있다.
한창 경제성장기에 놓여있던 중국, 그 시기를 오로지 성공이라는 담론으로 살아온 두 젊은이 샤오샤오와 첸칭을 통해 이 영화는 잃어버린 삶의 가치에 대해 얘기하려는 듯 보인다.
특히 영화 초반 위태위태해 보일 정도로 높은 키높이 신발을 신은 샤오샤오의 모습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성공을 위한 의지가 아닐까 했고. 베이징이라는 중국 최대의 도시에서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거르지 않은 컬러의 거친 화면으로 담아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조금 더 높은 곳에 가 닿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한다.
이 괴로움의 순간들이 오히려 컬러로 보이는 건 어쩌면 다분히 의도된 바가 아닐까 싶었다. 다가 올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희망이 있었기에 그려지는 총 천연색의 과거. 춘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무시로 오가며 현실이란 얼마나 날것의 삶인지를 설득시키려 한다. 시간 상 현재의 이들 모습을 '흑백'으로 처리한 감독의 의도된 연출은, 마지막에 가서야 합을 맞춘 듯 이해가 된다. 그리고 현재의 두 사람 상황을 화면의 색깔을 통해 직시하게 만든다.
그들은 오랜 친구였다가 연인이 됐다. 어느 순간 서로에 대한 관심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치열한 삶을 꾸려간다. 하지만 삶은 늘 그렇듯 녹록지가 않다. 어떻게든 거대도시에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사랑은 낡은 소파 하나 들여놓지 못하는 빈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공간처럼 위험하다.
베이징에서 버티는 것은 도박과도 같다는 첸칭의 대사. 잃거나 엄청나게 성공하거나. 그런데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반드시 잃게 되는 게 게임의 법칙 아닌가. 삶은 긍정과 부정이 교차 편집된 복잡다단한 다큐멘터리 같기에.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성장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로 읽혔다.
■사랑의 문법, 사랑의 방정식
젊은 날 치열한 사랑을 해 본 이들을 다 알 것이다. 사랑의 문법이 얼마나 사람마다 다른 지에 대해. 감정의 결이 백이면 백, 다른 방향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 결들이 방향을 잃고 얽혀버릴 때, 사랑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또한 위협적으로 달콤하다. 너무도 사랑한다 여겼던 첸칭과 샤오샤오, 그들은 왜 서로의 곁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을까?
첸칭이 만든 온라인 게임이 성공하고, 첸칭은 그 성공으로 드디어 그렇게 원하던 공간을 베이징에 마련했지만, 그의 곁에는 이제 더 이상 샤오샤오가 없다. 물질적으로 성공하면 그토록 원하던 가난한 사랑이 행복으로 바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보금자리는 과연 집만으로 충족되는 것일까. 샤오샤오가 원하던 보금자리는 베이징의 집이 아니었구나. 항상 깨달음은 늦게 와서 이렇게 사랑을 어긋나게 만드니.
행복의 기저는 무엇으로 이뤄져 있을까? 사랑하는 마음만 크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방정식은 생활기반에선 성립하기 힘들다. 이 영화는 그 힘듦을 현실적으로 그려내서 더 아프게 와 닿는다. 또한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남기기도 한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때, 바로 그때 사랑을 태우던 귀중한 불씨도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영화는 내내 설명하려 한다. 그들에게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으니까.
사랑과 이별엔 '만약'이라는 조건을 붙이기도 힘들다. 만약 이랬더라면, 이라고 끊임없이 합리화를 시켜보는 두 사람이지만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서로의 마음이 몸보다 먼저 이별을 고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어쩌면 생각과는 달리 뻔하지 않은 미래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기에 온통 미래는 분홍빛이라 여길 뿐.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언젠가는 치열한 현실이 되기에, 그저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버티는 삶. 그곳의 종착지는 조금 덜 고단한 현실일 뿐이다.
■ 고향 같은 사람, 그런 사랑
첸칭은 자신이 만든 온라인 게임을 통해 샤오샤오에게 하늘의 별을 따다 주고 바다의 진주를 캐다주는, 약속한 사랑을 이뤄주려 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게임 속의 '미안해'라는 화면으로 대신하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냥 말로서만 존재할 뿐, 마지막엔 다시 현재의 모습이 칼라로 바뀌면서 과거의 모습이 흑백으로 전환된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게임과는 다른 냉혹함이라는 걸 보여주기위한 일종의 장치가 아닐까?
색의 전환만으로도 둘의 상황이 충분히 설명되기 때문이다.
샤오샤오에게 보낸, 하지만 늦게 읽힌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는 첸칭 아버지의 편지는 왜 이 영화가 고향이라는, 혹은 춘절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지 단숨에 납득시킨다. 첸칭과 샤오샤오는 서로에게 그런 사랑을 원했던 것이다.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고향 같은 사람, 춘절의 분위기처럼 마냥 행복하고 들뜬 순간을 지닌 것 같은 사랑.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음이니. 이들의 사랑은 결국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공간, 기차가 달리는 길처럼 그렇게 교차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사랑의 문법엔 늘 변신을 꿈꾸는 형용사가 많이 있다. 절대 불변의 명사, 단 하나의 사랑을 수식하는 형용이 무수하기에 사랑도 어쩔 수 없이 변한다. '아름다운'이나 '영원한'에서 '슬픈'과 '아쉬운'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향 야오장을 다시 찾을 리 없는 첸칭과, 아직도 숱한 그리움을 '야오장'에 두고 있는 샤오샤오의 현재. 진정한 사랑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거라 말하고 싶지만, 사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녹슨 그리움이 된다는 걸 영화를 보며 깨달았으니, 이쯤 되면 '새드엔딩' 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