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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각자 생긴 대로 사는 거야

넷플 오리지널 영화, 자기 앞의 생

by 초린혜원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아주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성공한 원작이 있기에 어차피 위험했던 도박


너무도 훌륭한 원작의 명성에 기댄 영화들이 원작에 버금갈 만큼 큰 호응을 이끌어내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원작의 세계관이 그대로 구축되거나 나아가서는 그 이상의 것이 구현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출판물이 가지는 한계를 영상물은 언제든 뛰어넘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전제되기에 가능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 영화 '자기 앞의 생'도 바로 이 범주에 들어 있다.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원작은 이미,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읽혔고 엄청난 호평을 이끌어낸 작품이기에 말이다.


나 또한 막, 사춘기로 접어들었던 어느 날, 이 소설을 밤새 읽으며 열 살인 줄 알고 살다, 갑자기 열네 살이 돼버린 소년 모모의 삶을 등 뒤에서 훔쳐보기도 하고, 때론 어깨동무를 하며 절친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청소년기를 보냈던 모든 이들에게 그래서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모모는 성장기를 함께한 친구이거나, 때로는 또래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한, 시대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피아 로렌이라는 불세출의 명배우를 '마담 로자'로 캐스팅하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얼마나 인물들의 묘사가 잘 돼 있을까? 각 캐릭터 간의 끈끈한 유대는 또 얼마나 살아 숨 쉬며 화면을 꽉 채워줄까? 모모의 천진하면서도 영민한 정신세계는 배우가 어떻게 연기해낼까? 등등.. 영화를 보기 전 내 마음은 온통 기대로 가득 찬 물음표로 몽글몽글해졌었다.


원작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해서


애써 미뤄두고 아껴두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날 오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상영시간 내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영화가 너무 대단해서? 역시 소피아 로렌이라서? 아니다. 의무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실망이 컸다.


말마따나 기대가 컸던 탓도 있겠지만, 명작인 원작에 대한 존중과 경외는 둘째 치고, 가장 중요한 마담 로사와 모모의 사랑과 갈등에 대한 묘사도 지지부진한 데다, 그들의 전사나 관계의 발전을 불러오는 플롯을 이을 스토리 전개도 너무 엉성하고 미미했다. 특히 소설 속, 모모라는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 소년이었는지를 잊게 만든 건, 정말 너무 큰 감독의 실수였다.


영화는 12살 모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군상들. 각자가 가진 세계를 투사하며 타인과의 경계를 허물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원작에 다가가려고 한다. 하지만 원작과 시대적 배경을 달리했기에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에서부터 벌써 이 작품은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마담 로사의 트라우마를 연기하는 늙은 소피아 로렌(사실 원작에서는 매우 거대한 체구를 지닌 여인이다)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아 씁쓸했고, 모모를 연기하는 아역배우의 건조한 표정 또한 원작의 모모를 형상화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캐릭터의 본질이 허물어진 영화라니! 그 이후는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꼭 이렇게 현대로 가져와야 했을까? 더군다나 공간적 배경마저도 소설이 그려내는 그곳과는 너무 다르게 거대하고 장엄했다. 시대가 안고 있는 아픔은 세월에 따라 그 색이 확연히 달라지는 법이다. 그래서 '당대'를 살았던, 그래서 더 에밀 아자르의 모모에 열광했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생경하기 짝이 없는 작품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영화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부터 미스 캐스팅하더니, 여기에다 배우들 간의 유기적 연대가 전혀 보이지 않은 화면들을 무의미하게 연결함으로써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한다.


보는 내내 가장 아쉬웠던 건, 원작 소설에서 모모의 성장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하밀 할아버지와의 대화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모모의 성장사에 이 하밀이 끼치는 영향이 이런 식으로 치부돼선 안 된다는 것을.


영화에서는 그다지 주요 인물로 보이지 않았고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 혹은 사랑할 대상'이라는 핵심적인 대화마저 윤색돼 버렸다. 감독은 왜 굳이 명작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면서 원작에 충실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관객을 납득시킬만한 자기만의 색깔마저 화면에 입히지 못했을까?


원작의 껍데기만 가져온다고 영화가 완성될 리 만무


모모의 내레이션이 전반에 깔리면서 카메라는 매춘부, 매춘부의 아이들. 여장남자. 피난소 혹은 거지소굴 ,

마약상을 차례대로 보여주며 선택할 수 없는 하층의 삶을 이미지화하고자 한다. 겨우 12살의 소년인 모모는 마약 딜러의 삶을 살고. 거친 길을 내달리는 야생마 같은 순간을 이어간다.


소년을 향해 가장 최고의 무기는 언어라고 얘기하는 어른. 하밀. 사자가 그려진 양탄자를 보여주며 사자는 힘, 끈기 믿음을 상징한다는 대화를 이어가고. 이후 꿈에서 암사자를 만나 교감을 하는 모모. 그리고 환하게 스며드는 빛 속에서 흐르는 음악 위로 걷는 듯 춤을 추는 로사의 몸짓을 통해 가장 밑바닥의 삶에도 볕이 드는 순간을 잠시 그려내면서 억지 감동도 이끌려고 노력도 해 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마약 딜러를 해 번 돈으로 가지게 된 자전거를 타며 모모가 말한다. "각자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나는 행복에 목숨을 걸지 않겠다." 어쩌면 영화 전반을 통해 가장 큰 울림을 가져온 대사가 아닐까 한다. 원작에도 이 문장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영~아스라하지만 원작에 있든, 없든 이 대사 하나만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굉장히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앞의 생'을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갈 모모의 발자취를, 그나마 따라가게 만들 것 같았다.


사족이지만 덧붙여보자면


이 영화의 색은 전체적으로 빛바랜 카키색 같다. 칙칙하고 어둡다. 한쪽에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곰팡이가 슬어 있을 것 같다. 슬픔이다. 그것도 오래 묵어 긁어낼 수 없는 사랑이 변질된 슬픔이다. 굳이 이런 색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로사와 모모가 서로에게 건네는 눈빛 연기로 그 심도를 더해야 했다.


원작에서 너무 많이 멀어졌지만, 로사의 장례식 후 다시 나타난 암사자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보였던 모모를 통해, 사랑의 소중함을 깨달은 후, 삶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단단히 살아가고자 하는 원론적 회귀성에 주목한 점은 그나마 평가받을만하다.


모모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커다란 헤드폰은 마치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청진기처럼 보였다. 감독이 소품으로 의도한 것일까?


'네가 아무 말 없어도 내가 곁에 있을게'가 반복되는 Ost의 가사는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했고 영화의 모든 내용을 충실히 요약한다. 빈약한 내용을 보전하려는 심산이었다면 매우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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