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바다가 품고 있는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때가 있으랴마는, 누군가 내게 '어느 계절의 바다가 가장 좋으냐?" 물어온다면 지체하지 않고 즉시 '겨울 바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인적 하나 없는 황량하고도 쓸쓸한 고립무원의 겨울바다 말이다.
처음 방송일을 시작했을 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많이 힘들고 고독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식이 돼 있지 않을 때였기도 하고, '프리랜서'라는 알량한 껍질에 숨어 사는 자신이 가끔 초라해 보이기도 했을 터였다.
방송시간은 고작 2시간여였지만 원고를 쓰고(심지어 수기로 원고지에 쓰던 시절이었다) 방송 시간을 지키고, 산타의 주머니처럼 불룩한 행낭에서 우리 프로그램으로 배달된 엽서나 편지를 따로 모아 읽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어디 그뿐이었나! 생방송 시간 동안 신청곡이라도 들어올라치면 스튜디오에 대기하고 있다가 레코드 실로 헐레벌떡 달려가 음반을 찾아오는 것도 작가인 나의 몫이었다.
그런 세월을 이태쯤 지내다 보니, 누구나 다 부러워하는 '거대 금융업계 종사자', '어마어마한 연봉'의 자리를 박차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뛰쳐나온 내가 슬~슬 한심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 모험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면서 글줄이나 좀 써보겠다고 직업까지 바꿨는데, 정작 쓰고 싶은 글은 한 줄도 못 쓰다보니 불만만 그득한 날들이었다.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아주 가끔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로 연명하는 시간 속,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 스트레스 가득한 얼굴은 부을 대로 부은 데다 윤기라곤 하나 없이 푸석푸석하고, 푸른빛을 자랑하던 내 눈동자는 더 이상 형형하지 않았다. 나는 달아나야 했다. 이 거친 광야에서, 공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진공의 숲에서, 어디로든.
■바다는 거기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네
그렇게 나는 무작정 바다로 달려갔다. 고3 겨울방학, 입시를 끝낸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남자 사람 친구 둘과 찾았던 그 겨울의 바다로 말이다.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그해 겨울바다엔 모든 것이 있었네
선언문처럼 장대한 크기로 다가오는 시구절이 있다. 김남조의 겨울바다가 그렇다. 첫 1연에서 모든 할 얘기를 다 해버린다. 선언하고 끝내버린다. 이런 시는 정말 흔치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보자마자 매료돼 버린 것 같다.
아직도 문득 겨울바다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면 이 시의 첫 구절을 길어 올려 바다로 달려 나가곤 한다. 여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시절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막 대학 합격 발표를 받아 든 며칠 후였다. 가난한 시인 지망생 셋이 어두운 다방 한 구석에 앉아 바다를 보러 가자 모의하던 참이었다. 청춘의 무모함은 때로 놀라운 실행력을 지니기에 서로의 주머니에 얼마가 든 지 채 확인도 하지 않고, 김남조의 이 시구 하나만을 깃발로 뽑아 들고 무작정 그렇게 부산 바다와, 을숙도에 머물러 있을 철새들을 보러 떠난 것이다.
그러나 바다를 향한 설렘과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부산역에 내려서 배고픔이라도 달래려 서로의 재정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의 호기로운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셋다 딱 편도의 기차표를 끊을 정도만의 돈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을숙도는?' '태종대는 어쩌고?' 누구랄 것도 없이 원망 어린 눈길을 서로에게 쏘아댔지만 어쩌랴! 현실은 당장 몰려오는 배고픔과 시내버스를 탈 돈조차 없는 상황인데.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였다. 한 친구가 분연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시계 좀 비싼 기다. 이거 맡기자"
"개안켔나? 그거 입학 선물로 받은 거라미?"
"개안타, 나중에 찾으러 또 한 번 부산 오면 된다 아이가!"
친구의 결단은 곧바로 우리의 안심으로 이어졌다. 이제 갓 스물이 돼 세상 물정에 어두우리라 싶었지만 이는 기우였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전당포를 찾아내더니, 아주 값도 후하게 쳐서 시계를 돈으로 바꿔온 것이었다. 역전의 가락국수 집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을숙도행 버스를 타는데, 왠지 실~실 웃음이 새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무모해도 이렇게 무모할 수가 있었을까! 그저 겨울 바다를 보겠다고, 김남조의 저 겨울바다 첫 구절을 꼭 확인해 보겠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선 길이라니. 하지만 때때로 생각한다. 삶이 마른 옷처럼 서걱 일 때, 아무런 자극 없이 평온한 시간들이 흘러갈 때, 그해 겨울, 우리가 보았던 바다에 대해,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언, 을숙도의 장관에 대해, 을숙도의 쓰러진 갈대들을 가르며 날아오르던 철새 떼의 장관에 대해.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한 때에 대해.
그렇게 방송일을 하는 내내, 마음이 물에 불린 북어처럼 속절없이 부풀 어오를 때면 부산행 열차에 올라타곤 했다. ktx가 생기기 전까지 꽤 긴 시간을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 고행 길이었음에도 그렇게 찾은 바다는 내게 숨 쉴 틈을 선물해주곤 했기에. 겨울바다에 두고 온 추억도 그리워할 겸, 미지의 새들은 또 얼마나 겨울바다와 함께 태어나고 사라져 갔는가를 헤아려 볼양으로 말이다.
계절이 뒷모습을 보이기 전에, 미루지 말고 겨울바다에 가야겠다. 물론 시인의 눈에만 보였을 '물이랑 위에 불붙은 허무', 그 진실을 탐닉하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