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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구리 Apr 29. 2021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4. 이 나간 톱니바퀴가 되다

2011년 2월, 인생 4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버려진 열정만큼 얻어낸 상처로 물든 다짐, '내가 하는 만큼 인정받는 일을 하겠다'를 정말 실천했다. 

인생 계획에 없던 영업직을 선택한 것이다. 영업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무모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횡령이 이렇게 쉽다니...

회사의 영업팀 운영 방식은 조금 특이했다. 본부장이 팀 운영비를 받아 재량껏 팀을 운영했다. 팀 운영비에는 팀원의 월급, 교통비, 회식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업사원의 기본급을 본부장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입사 후 몇 개월이 지나서야 팀원 간 기본급이 다르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면서 이 독특한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인지했다. (하, 너무 어리숙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되고 1개월도 안되어 본부장이 잘렸다. 팀원별로 기본급이 다른 건 본부장 재량이지만, 운영비를 본부장이 갖는 건 당연히 불가였다. 본인이 데려온 직원에게 월급을 많이 챙겨주고, 그 돈을 뒤에서 나눠가진 모양이다. 회삿돈 횡령이 이렇게 쉽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팀원은 안 잘리고 본부장만 잘린 것도 이상하다. (후에 이 팀원은 나름 실적이 괜찮아 장기근속했고, 회사 여직원과 결혼했다.) 

회사는 이 사건 이후로 영업팀 운영방식을 변경했다. 다른 회사들처럼 인사팀에서 영업사원 고정 기본급을 정하고,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사계절의 짧은 가을

사실 본부장이 횡령을 하든 말든 마음을 쓸 겨를도 없었다. 영업 경력이 전무했기에 당장의 실적도 전무했다. 실적이 없어서 잘리는 건 너무 굴욕적이라 여기던 나였기에, 일 잘하는 영업사원들을 열심히 관찰하며 그들만이 풍기는 분위기와 그들만의 노하우를 최대한 흉내 냈다. 어렵사리 자리를 보존하며 영업 일에도 서서히 익숙해졌고, 실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나자 전체 영업사원 중 실적 2위를 하기도 했다. 한 번 오른 실적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인센티브도 꽤 받아 적금도 들고 부모님에게 용돈도 통 크게 드릴 수 있었다. 영하 10도가 넘는 겨울에도, 30도가 넘는 여름에도 실적 하나만 보고 내달리던 시간이었다.



차디찬 겨울

사람 일은 항상 사계절 같지 않던가. 가을의 수확기가 지나면, 차디찬 겨울이 오게 마련이다.

2012년 9월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10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판정을 받던 순간 그저 멍했다.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에 그저 네, 네, 네만 하다가 병원을 나왔다. 병원을 나서니 그제야 현실감이 들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29살 밖에 안 먹었는데 나는 왜 암에 걸린 걸까. 내가 뭘 잘못 산 걸까. 왜 나일까.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길 한복판에서 펑펑 우는 청승을 부렸다. 


2013년 2월 예정이던 수술은 다른 환자의 수술 취소로 2012년 12월로 앞당겨 치러졌다.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아내가 암수술이라니. 남편에게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저절로 눈물이 난다.) 

난생처음 수술대에 올라 전신마취를 했다. 암의 정도에 따라 갑상선을 50%~100% 제거하는데, 나는 암이 생긴 지 이미 몇 년이 지난 상태였기에 갑상선을 100% 제거했다. 전신마취에서 잘 깨어나지 못해 깜빡하면 스르륵 눈을 감는 나를 깨우느라 남편은 병실 침대 옆에 2시간 동안 벌을 섰다. 수술은 잘 끝났고, 1월에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를 통해 전이된 곳이 없다는 결과지를 받았다. 하지만 암 수치는 여전히 비정상이었고, 체력도 면역력도 급격하게 떨어졌음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게다가 수술 후 원인불명의 두드러기가 온몸에 퍼져 피부과도 다녀야 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간호사인 친구를 통해 그 원인을 알게 됐는데, 전신마취제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그중 맞지 않는 마취제를 사용한 경우 알레르기 반응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알레르기라곤 하나 없는 나에게 신기한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적, 실적, 실적

컨디션이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병가를 끝내고 3월에 회사에 복귀했다. 복귀 이유는 불안함과 경제적 이유였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복귀했지만, 사실 체력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복귀한 지 2주가 지난 어느 날, K 영업 본부장이 나를 불렀다. 몸은 어떤지 인사치레가 끝나자마자 그의 입에선 '실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개구리님, 이번 달 실적이 부족해. 실적이 왜 이래?"


병가 기간 동안 내 거래처를 팀원들이 나눠서 대신 관리했고, 복귀 직전 이미 내 거래처에서 실적이 나온 상태였다. 복귀하자마자 같은 거래처에서 또 실적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었고, 새로운 거래처를 갑자기 뚫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본부장이 병가에서 돌아온 직원과의 첫 면담에서 한다는 소리가 실적이라니...!


"1년 넘게 영업했으면 새로운 거래처 정도는 바로바로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몸소 체험했다. K 본부장은 영업 경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벌은 좋았으나, 그 때문에 지금의 자리가 첫 회사였다. 선한 얼굴이었지만, 항상 가시 돋친 말을 해서 팀장들과 자주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의 선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는 이미 나에게도 '자잘한 짜증'이 되곤 했었다. 직전 회사 상사가 워낙 큰 상처를 남기고 간 터라 자잘한 짜증 따위 무시하고 지냈는데, 경력도 없는 상사에게 영업력에 대한 잔소릴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팀장이 있는데, 팀장 통해서 말할 순 없었던 걸까. 

K 본부장의 말속에서 느껴진 건 오직 이거 하나였다. 네가 아프든 말든 난 모르겠고, 실적 못 낼 거면 나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면담이 끝나고, 내 속은 분노와 우울로 소용돌이쳤다.


'갑상선암. 암 중에 가장 별거 아닌 암. 거북이처럼 느린 속도로 퍼져서 안전한 암. 세상에 안전한 암이 대체 어딨어? 내가 다른 암이어도 이런 취급을 받을까? 더 중증 암에 걸려서 병가 마치고 퇴사했어야 하는데 복귀를 해버린 거지. 처치 곤란하게... 아님 어딘가 암세포가 전이됐다는 흥미진진한 소식을 전했어야 하는데 재미없게 돌아온 건가. 컨디션 괜찮다고 둘러대지 말고, '아뇨. 죽을 거 같지만 입에 풀칠하러 출근했습니다. 왜요?' 했어야 했던 걸까. 난 왜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거지... 그래, 영업사원은 사람이 아니라 숫자고 실적이지. 내가 자진퇴사 안 하고 복귀한 게 문제지. 아픈 내가 문제지. 아픈 내가 문제야.'


아프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병원에 쏟아부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수술을 기다리는지. 얼마나 괴로운 치료를 참아내는지. 수술 후 몸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병원 진료를 기다리며 어떤 상황을 보고 겪고 느끼게 되는지. 또 다른 병이 어떻게 따라붙는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난 3월, 토요일 오전 남편과 함께 병원에 정기검진을 갔다. 갑상선 정기검진이 아닌 산부인과 정기검진이다. 2017년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받은 후,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고 있다. 최근 20~30대 여성에게 흔한 병이 되어버린 자궁근종은 보통 별다른 증상이 없지만, 일부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보험 실비 청구를 하면서 담당자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갑상선 관련 질환을 겪은 여성 고객 대부분이 자궁근종 관련 실비 청구를 추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학 논문을 읽고 하는 말은 아니라곤 했지만, 경험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2017년에는 관련 검색 결과가 없더니, 오늘 검색해보니 갑상선 질환 후유증이 맞는 모양이다.)


작년에 근종이 재발했고, 올해는 의사 선생님 얼굴이 심각해질 정도로 커져 있었다. 주말이라 더욱 정신없던 병원을 나와 조용한 차에 타니 불쑥 울컥했다. 왜 만날 나는 아픈 걸까. 왜 자꾸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갑자기 우는 나를 보며 남편은 왜 우냐며 내 맘도 모르는 소릴 했다. 발끈한 내가 그냥 아무 말을 말든가 왜 우냐고 하는 건 뭐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딨어! 아픈 게 죄야? 너가 왜 울어?"


아픈 게 죄인 회사원으로만 살다가 아픈 게 죄냐는 남편의 아내로 돌고 돌고 돌아온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부하직원, 어느 회사의 과장, 실적으로 밥값을 하는 애 또는 못하는 놈으로만 보낸 8년이었다. 물론 지난 8년 동안도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내였지만, '아내'라는 역할보다는 '회사원'이라는 역할에 집중적으로 충실했던 나였다. 


아픈 게 대체 언제부터 죄가 되었던가. 

아파서 놓친 또는 놓치게 될지도 모르는 실적보다 아픈 '사람'이 먼저인 회사는 없는 걸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회사는 이윤을 창출하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이 나간 톱니는 갈아 끼워야 할 대상이지, 보듬어 줄 대상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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