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장 같은 공간 다른 시선

남편이 쓰러진 날 아들이 쓴 일기

by 능수버들

남편이 쓰러진 날 아들이 쓴 일기입니다. 숨 막히는 기록이라서 공유합니다.


제 브런치인지라 아들 글을 온전히 올리는 것보다는 사이사이에,
제 느낌을 메모했습니다.

아버지는 수술실 중, 보호자 대기실에서


수술실 옆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서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은 걸 아쉬워한 적은 처음이었다. 엄마 옆에 앉아서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병원으로 온 엄마. 집으로 가 밥도 먹고 숨을 좀 고르고 왔으면 했다. 엄마가 혼자 집으로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애초에 내가 병원에 온 것도 엄마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둘로 쪼개 하나는 엄마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여기 앉아있게 하고 싶었다. (아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수술 중인 아빠를 위해 할 일이 없어서, 엄마 걱정만 한 것 같다. 사백안이 되어 놀란 엄마를 잠시라도 쉬게 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보호자 대기실에서 같이 있어야 할 엄마도 필요했을 아들. 무슨 연유에서인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나는 아들을 집에서 대기하라고 하고 나 혼자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왔다. 아들이랑 같이 병원에 같이 왔어야 마땅했거늘.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을 테지.)



엄마는 아빠가 죽어버린 것처럼 단정 지었다. 나는 아빠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아직은 울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 지금은 슬픔을 끌어올릴 타이밍이 아니었다. 엄마가 가끔씩 울 때마다 나는 그런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엄마를 이해한다고, 마음껏 울라고 할 수도 없었고, 다 괜찮을 거라는 소리를 낼 수도, 나도 엄마만큼 슬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런 예고편도 없이 급작스레 쓰러져 버린 남편. 꿈쩍도 안 하길래 죽어버렸나 싶었는데 눈도 뜨고 말도 했던 남편. 수술실에 들어간 후 4시간가량 한다던 수술 시간이 길게 연장되면서 극도로 초조해졌다.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울어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은 데는 눈물만 한 것이 없었다.)



엄마가 마음껏 울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보다 먼저 대기실에 앉아있던 왜소한 모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대기실 구석 자리에서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처음엔 상황이 안 좋다는 정도만 눈치챘다. 좁은 대기실 안에서 그들의 대화나 전화 통화를 통해 그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 차이라면 그쪽의 가장이 우리보다 하루 먼저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는데,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소생할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대기실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자. 너무나 가녀린 엄마가 아들한테 기대고 있었다. 간간히 눈물 흘리면서 오는 전화를 받는 엄마. 사연 인즉은 가녀린 여자의 남편이 어제 뇌출혈 수술을 했는데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부는 이혼은 안 했지만 따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쓰러진 줄 몰랐다가 나중에 발견을 한 것이다. 골든타임을 넘겨버린 상태라서 수술을 했지만(...)



각자 고유의 사연이 있는 거라지만, 우리와 그들의 경계엔 적갈색의 사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난 엄마가 슬퍼하는 것조차 자칫 그 모자에게 기만으로 비칠까 조심스러웠다. 그만큼 그 모자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차분해 보였다가도, 아직은 아니라는 듯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눈시울을 붉히기를 반복했다. 피해자. 남은 가족들은 피해자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그렇기에 피해자들은 연대하여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대기실 안에서 피해자들 간의 끈끈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인류애적 감성으로 치유를 기원하고 있었다. 영원히 치유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내가 우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는 표현에서 문득 부끄러워졌다. 난 그 당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환자 가족들 간 끈끈한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의 아픔에 마음을 써 준 아들이 어른스럽다. 그들 모자는 애석하게도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와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는 일 때문에 집에 못 들어오는 날이 태반이었다. 주말에 가끔씩 집에 들어오시는 정도였는데 사고 전 2.3일은 집으로 퇴근을 하셨다. 엄마랑 아빠는 엊그제 밤이랑 어젯밤만 해도 반주를 마시며 뭉쳐야 찬다를 시청하며 다정하게 담소 나누는 모습이었다.(남편이랑 30년을 넘게 살면서 이 무렵이 가장 안온한 시기였다.)



아침에도 똑같았다. 평소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7시 무렵 일어나 누운 그대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8시 15분. 시간을 기억하는 건 나중에 핸드폰을 보니 엄마가 119를 부른 시각이 그때였기 때문이다. 난 간간이 상상을 했다. 엄마가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혹은 아빠가 내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위급상황을 알리는 상상을.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이 사고를 당했을 것이고 그때 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가끔 시뮬레이션을 돌려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기억나는 건 사백안으로 새빨갛게 충혈된 엄마의 두 눈. 아마 그 장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엄마의 목소리와 몸짓에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위급함이 전해졌다. 나는 묻지 않은 채 안방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 잠깐동안 상상했다. 피가 범벅이 되어 있을까. 피를 본다면 내가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 있을까. 목격한 광경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다시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119 요원이 기도 확보하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들은 무엇이든 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서너 발자국 밖에 안 되는 거리를 사력을 다해서. 그때의 내 표정을 난 모른다. 아들만은 알았다. 두서 없는 내 표정 속에서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품에서 아빠를 보낼 수 없는 간절함


침대 위에 아빠가 엎어져 있었다. 아빠를 뒤집는 일이 운동을 꾸준히 해 나름 힘이 좋다고 자부하는데도 쉽지 않았다. 아빠가 182의 거구이기도 하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은 어디든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팔은 너무 쉽게 들렸지만 아무렇게나 깔려댔다. 팔이 깔리지 않도록, 다리가 꼬이지 않도록 몸을 뒤집어,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아빠, 똑바로 눕혔음에도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혓바닥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기도 확보, 목을 받쳐 들었다. cpr을 시도해야 하나. 119는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기도만 확보하고 배를 보며 숨이 쉬어지고 있는지 확인을 하라고 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있었다. 흉부 압박을 강하게 하면 갈비뼈가 부러진다던데, 지금 저 혓바닥으로 가득 찬 입 안으로 내 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 119 요원이 내게 cpr을 시도하라고 하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건지 완벽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숨이 들어갈 틈이 있는지 확인하던 차 그때 아빠가 컥컥거리며 숨을 쉬었다. (나는 이때 아들이 남편을 어떻게 다루는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끼어들면 만에 하나라도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 오로지 아들만 믿었다. 전화기 너머 요원의 기계 같은 목소리와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겹쳐, 방 안이 숨 막힐 듯 조용하면서도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그 긴장감을 이겨내기 위해 남편은 아들 몫으로 두고 나는 다른 것들을 해냈다. 119 요원들이 최대한 빨리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길을 터 놓았다. )



혓바닥을 이겨내고 작은 숨이 올라왔고 그 틈으로 더 작은 숨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119는 기도 확보만 충분히 하라고 지시했다. 기도 확보. 내가 할 일은 기도 확보. 할 일이 확실해진 순간 부로 온 힘을 다해 아빠가 한 번이라도 더 제대로 된 숨을 쉴 수 있도록 뒷목을 강하게 받쳤다. 얼마나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대원들은 언제 도착하는지,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숨을 쉬어. 제발!”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흉부 압박을 하라는 지시는 없었지만 숨이 멎을 것 같아 불안해질 때마다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을 압박했고 그럴 때마다 그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아들의 숨소리와 흉부 움직임에 따라 들려오는 가벼운 헐떡임, 입속 깊은 곳에서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긴박하게 방 안에 울렸다. 후에 아들이 말하기를 팔이 몹시 아팠다고 했다. 아빠를 안은 팔에 얼마나 강렬하게 힘을 줬는지 팔이 잘 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저릿저릿했다고. 절체절명의 순간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오로지 생명을 살려야 된다는 사명감만 있을 뿐이다.)



엄마는 대원들이 1초라도 빨리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문을 열어두고 병원으로 갈 때의 최소한의 물품을 바쁘게 챙기고 있었고, 나는 그 모든 걸 소리로만 들으며 아빠의 얼굴을, 입 속에 가득한 혓바닥과 배와 가슴의 움직임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내 품에선 절대 이 사람을 죽도록 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내 품에선 절대 이 사람을 죽도록 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라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오열을 하고 말았다.)




큰 일을 겪어보니 가족같이 소중한 존재가 없다. 뭐든 아들과 상의를 했고 서로 의지하면서 극한 고통을 견뎌 냈다. 딸은 임신 중이었고 워낙 감수성이 풍부한지라 늘 조심스러웠다. 어떻게든 안심을 시켜 주려 애썼지만 그 아이 눈과 목소리는 한결같이 젖어 있었다. 태아도 태아지만 어쩌랴. 내 아빠가 하루아침에 저리 됐으니.
아들은 이번 일 겪으면서 (누나, 매형) 또래끼리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정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누나의 존재가 새로웠다고 한다. 우애가 돈독해진 게 보일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낸다. 아들이 자식은 둘 이상 있어야 된다고 주장을 한다. 본인은 아직 결혼도 안 했으면서 누나더러 아이 한 명 더 낳으라고!



이 글은 아들의 허락을 받고 올린 글임을 밝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