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과 걷기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 한강-
남편이 병원에서 어찌 견뎌낼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중환자인데, 가족이 옆에만 있어도 위로가 될 터였다. 그런데 혼자서 병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 내고 있을 것인지 머릿속이 까매졌다. 홀로 보낸 보름 동안 남편의 고충도 어마어마했겠지만 나랑 아들도 만만치 않게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면회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 통화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는 환자와 통화도 여의치 않게 막곤 하였다. 오로지 남편과 이어지는 끈이 전화 통화였으므로 나는 간호사한테 거칠게 항의를 거듭했다. 왜 통화를 못 하게 하느냐면서. 간호사는 어이없는 항변을 늘어놓았다.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전화 통화는 가급적 제한하는 것이라고."(가족한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 간호사가 신참이어서 규정을 잘 몰랐다고 사과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해 불가였다.)
수간호사 덕분에 남편과 극적으로 통화가 되었다. 남편과 통화하기 전에 담당 간호사에게 먼저 남편의 상태를 물었다. 눈은 뜨고 있느냐? 말은 하느냐? 손발을 움직이고 있느냐? 등등을. 그리고 남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눌한 말투, 그는 말귀를 잘 못 알아 들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아, 면회가 안 된다 하니 어쩌겠는가. 가볼 수도 없으니 간호사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남편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의식이 깨어나 보니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뿐인 공간에서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아무것도 가늠이 안 되어 안타깝기만 하다. 옆에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목이 메어올 뿐이다.
15일 동안의 극한 고통을 버티기 위해 내가 한 일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눈물에 몸을 맡기는 일이었다.
참으려 해도 가슴 깊은 곳에서 화산의 용암처럼 뜨거운 것이 끊임없이 치밀어 올랐다. 남편이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눈물로 희석해 내었다. 불안정한 감정을 견디기 위한, 나만의 유일한 수단이 통곡이었다.
남편을 병원에 두고 온 날, 새벽이 지나고 여명이 밝아 왔다. 창문 밖 하늘은 엷은 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세상으로 빛이 스며드는데, 내 마음은 여전히 캄캄했다. 급작스레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앙되었다. 둑이 무너지듯 울음보가 "툭" 터졌다. 숨조차 멎은 듯한 적막 속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문지방을 넘어 아들 방까지 닿을까 봐, 이불을 두껍게 둘둘 말아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벽에 부딪힌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가슴을 후벼 팠다. 그때 애정하는 막내 이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아도 되는데 구태여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 이모한테 곡조 섞인 넋두리가 묘하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모, 그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전조 증상 하나 없이 이게 웬 날벼락이랍니까. 응급수술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대동맥이 두 군데나 파열이 된지라 편마비로 살아야 된대요. 이모, 조서방 불쌍해서 어떡해요.”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겼다냐. 건강하던 사람이, 이게 뭔 일이다냐. 앞으로 네가 많은 것을 해내야 되니 밥 잘 챙겨 먹어야 된다. 이모도 속 상해서 어젯밤 한숨도 못 잤단다. 이모가 내일 가서 밥 사줄게.”
40분이나 전화를 붙잡고 나는 온몸으로 슬픔을 토해내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절친이 온다고 하여 기다렸다. 차마, 집안에서 친구를 맞이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승용차 안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시동 꺼진 차 안은 숨 죽은 듯 고요했다. 차문 여닫히는 소리와 사람들 지나다니는 모습과 풍경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사이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가 같이 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절친이기에 부부동반했던 추억이 한가득이었다. 연애시절부터, 아이 양육하면서, 같은 아파트 앞 뒤 동에 살면서 다복이 쌓았던 인연의 파편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친구가 탐라도로 이사를 갔기에 우리는 여러 번 제주도를 찾았었다. 그 안에 담긴 추억들이 좌악 펼쳐졌다. 때로는 호탕하게 웃고 때로는 눈물 콧물을 동원해서 같이 울기도 했던 친구에게 이 불행한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아득하였다. 만나자마자 둘이 부둥켜안고 초상이 난 듯이 오열했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에 비친 석양은 슬픔마저 황홀하게 물들였다.
다음날 친구를 공항으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오는 동안 뜨거운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운전하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울어 본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때 마침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혼자 다 감당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불행을 짊어진 여인이었다. 헝클어진 감정을 비집고 형님이 "서방님 금방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 동서."라고 위로할수록 심장이 끌어져 나오는 듯한 통증을 동반한 눈물이 쏟아졌다.
슬픈 감정이 올라올 때는 목놓아 울어야 된다. 눈물에는 감정 정화의 힘이 있다. 울고 나면 가슴 깊은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고, 까무룩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는 일도 중노동에 속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눈이 퉁퉁 붓고, 피곤이 몰려와 절로 눈이 감긴다. 눈물은 고통의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기 위한 시작이었다. 몇 날 며칠을 그리 울었는지 모른다. 슬픔의 강도에 따라 눈물의 양이 정해진 것처럼 그때의 나는 마른 샘이 다시 솟아오르듯, 끝도 없이 울었다. 그 많은 눈물 속에서 나는 조금씩 가벼워지면서도,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울지 않으면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고, 울고 나면 후련함으로 다시 살아낼 힘이 아주 조금씩 생겨났다.
두 번째로 한 일은 아들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해가 기울면 우리 둘은 말없이 길을 나섰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지만, 발자국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불빛 속에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슬픔이 더해졌다.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걷는 부부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다정하지 않더라도 부부가 함께인 그들이 부러워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순간순간 울컥하였다.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식음을 거의 전폐한 상태라서 두 시간 정도 걷고 나면 몸이 지치기에 충분했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슬픔이 바닥을 드러냈다. 피로가 밀려와 생각이 멈췄다. 그제야 비로소 견딜 수 있었다. 그날의 걸음은 슬픔을 흘려보내는 또 하나의 눈물이었으니. 이 두 가지를 하루 일과처럼 해 내면 밤에 까무룩 잠이 들 수 있었다. 2.30분도 채 잠들 수 없었지만.
당시 꿈을 자주 꾸었다. “시어머니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아기옷을 가져가 버리셨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사라지셨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데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뒤숭숭한 마음을 반영하는 꿈이라고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꿈보다 해몽을 더 잘하며 나는 또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