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 차, 소설기초 쓰기 과제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질문은 무의식까지 깨운다.
질문은 반드시 답을 요구한다,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질문은 다양한 정보를 준다,
질문은 마음을 열게 한다,
질문은 경청하게 한다,
질문은 설득하게 한다.”
<리더십을 코칭하라> P.133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잠시 멈칫했다.
“무의식을 깨운 질문은 반드시 답을 요구한다.”
라는 문장이 떠올랐지만 막상 답을 하려니 막연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위치를 떠올렸다. 아내이면서 엄마이고 할머니다. 기타 등등 죽 나열하면 줄이 길어질 것이다. 그 목록은 결코 나의 본질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앞을 내다보며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이전, 20대의 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관련된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 종로에 있는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왜 하루 종일 타자만 치게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결혼 후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소도시에서 여건이 되지 않았다. 자격증도 따고 싶었지만 온라인 수업이 없던 시절, 결국 생각만 하고 말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산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2000년도에 과감히 일을 그만두고 논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왕복 세 시간, 주 1–2회 대치동으로 향했다.
지혜의 숲, '차오름' 강사는 내게 법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곳에서의 배움은 거대했다. 몸의 한쪽만 쓰다 양쪽을 다 쓰는 듯한 희열, 반쯤 감긴 눈으로 살다가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게 된 황홀함. 역사 논술을 통해 나는 내 문제를 직시할 힘을 얻었다. 가족 간의 갈등,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의 출발점은 언제나 ‘나’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안에 평화가 깃들었다. 성격은 그대로였지만 성품은 긍정적으로 변해 갔다. 그 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며칠 전, 새로 일하게 된 곳에서 내가 케어하는 분과 담소를 나눴다. 취미로 글을 쓴다고 하자 그분이 뜬금없이 물었다. “글로 왜 성공을 못했어요?" 그 질문을 한 이유 인즉은 글로 성공했다면 내가 일을 안 할 텐데 싶어서였다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300일쯤 됐다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이전의 내가 눈앞에 서 있었다.
나는 한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사람이 평생 겪는 고통의 양을 법제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면 범칙금을 부과하듯, 고통에도 한도를 정해 초과하면 경고장을 날리는 세상. 그런 상상을 한 이유는, 그만큼 삶이 버겁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던 첫날, 남편은 섬망을 겪었고 나는 앞으로 어떤 고난이 기다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편마비, 인지 저하, 분노 조절 장애까지.
퇴원 후 남편은 헬스장을 다니며 운동에 매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호전되지 않는 몸 상태에 점점 절망해 갔다. 극도로 예민해진 남편은 말을 섞는 순간 수시로 오해와 곡해로 이어졌다. 나는 말수를 줄였고, 점점 무디어져 갔다. 밥하고 청소하고 음식 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책도, 드라마도, 외출도, 모든 게 무의미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숨소리만 내며 시간을 죽였다.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는 나날이었다
그건 늪이 아니었다. 벼랑 끝이었다. 그 끝에 서 있던 나에게 선택지는 명확했다. 뛰어내리거나, 버티며 내려오거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내려오는 길에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막다른 길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남편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나 자신을 지켜내려는 의지 덕분이었다. 글쓰기는 벼랑 끝의 나를 다시 걸어 나오게 한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쓰는 일은 특별한 사람의 몫만은 아니다. 삶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부서진 파편을 주워 적는다. 그 순간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기도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예술이 된다. 그렇게 작년 섣달, 나는 발칙하게 달라졌다. 옛날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침대에 웅크려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한글창을 열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지만,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일 줄 알았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춰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월 2~3편의 글을 써내고 있다.
남편이 쓰러졌던 기록에서 시작했다. 이전에 쓰던 글은 그저 습작에 불과했다. 브런치를 만나 작가님들의 글과 댓글을 오가며 나는 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어떤 글을 쓰든 결국 중요한 건 필력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다. 정윤 샘의 과제물을 수행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하고 있다. 나는 쓰는 사람, 글로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앞으로의 나는 특별한 계획은 없다. 오늘 하루 무탈(남편)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목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일도 하면서 작가님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살아 낼 것이다. 오늘 하루가 모여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기도 하니 '오늘 하루만 잘 살아내자'라는 마음으로 살아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