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쪼교 Aug 24. 2024

도화지 속의 그녀

하얀 도화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무엇을 그릴지 몰라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채로 벽에 걸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첫날이었다. 혼자 사는 집이었지만, 썰렁한 벽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져서 무엇이든 걸어두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벽에는 하얀 도화지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너를 그려.”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너를 그리라고.”

이번엔 벽 쪽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도화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리는 분명 도화지에서 들린 것이었다.


“네가 말했니?”

“그래, 나야. 여기에 너를 그려. 초상화 몰라?”


그녀는 어이가 없어 도화지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도화지는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 우선 윤곽부터 그려봐.”


귀찮았지만, 그녀는 마지못해 도화지에 사람의 윤곽을 대충 그려 넣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을 닮아 있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긴 머리 윤곽 외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 날, 퇴근 후 집에 들어왔을 때 도화지는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번엔 눈과 코, 입을 그려.”


그녀는 도화지를 향해 물었다.

“너는 도대체 뭐야?”


도화지가 답했다.

“나? 도화지야.”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래, 도화지는 맞지. 그런데 왜 자꾸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거야? 또 왜 하필 나를 그리라고 하는 거고?”

윤곽만 그려진 도화지가 말했다.

“너는 그림을 그리려고 나를 데려온 거 아냐? 그럼 그려야지. 그리고 내가 추천해 줬잖아. 너를 그리라고.”

그녀는 짜증이 치밀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 그림을 그리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잖아. 뭐가 더 필요한데?”


도화지가 울먹는 소리로 답했다.

“답답해서 그래. 눈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코가 없으니까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리고 입이 없으니까 너무 배가 고파.”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여긴 내 집이고, 너도 내가 산 거야.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하겠어. 더 이상 말을 걸지 마.”


그러나 도화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그럴 때마다 애써 무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도화지의 윤곽이 조금씩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가면 윤곽도 오른쪽을 보는 것 같았고, 그녀가 왼쪽으로 가면 윤곽도 그쪽을 향하는 듯했다. 어느 날은 도화지를 피하려고 벽 아래로 기어갔는데, 도화지의 얼굴 윤곽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양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한 번은 회식 후 술에 취해 비몽사몽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도화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눈, 코, 입을 그려줘.”


술에 취한 그녀는 도화지의 요구를 반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고, 흐릿한 정신 속에서 무언가를 덧그렸다.

다음 날 아침,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그녀의 눈을 부셨다. 그런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코 벽을 쳐다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까악! 뭐야 이게?”


벽에 걸린 도화지에는 동그랗게 뜬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생동감 있게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실제로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분명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워. 일어났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또렷한 발음이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도화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 그 눈은 그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도화지 속의 눈이 점점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제 너와 내가 정말 만난 것 같아. 이제 나의 완성을 도와줄래?”


도화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귀찮은 속삭임이 아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벽에 걸린 도화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동자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듯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웠다. 도망치듯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며칠 후, 그녀는 집에 돌아와 도화지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무심코 도화지 앞에 서서 물었다.


"내가 네 말을 들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도화지는 천천히 대답했다. 이번엔 그 목소리가 이전과 다르게 차분하고,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있었다.


"내가 완성되면, 너는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 역시 완성될 거야."


그녀는 도화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끌리듯, 그녀는 펜을 들고 도화지 앞에 앉았다. 이미 그려진 눈을 따라 코와 입을 섬세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도화지가 스스로 그녀의 손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점점 더 디테일을 추가할수록, 도화지의 얼굴은 더 생생해졌고, 현실과 점점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펜을 멈추고 도화지를 응시했다. 완성된 얼굴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도화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도화지 속의 그녀는 지금까지의 그림과는 전혀 달랐다. 그 눈동자는 더욱 깊고 생생했으며, 입술은 이제 막 말을 하려는 듯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화지 속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제 이해할 시간이야."


그 순간, 도화지 속의 그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이 아닌, 살아있는 그녀 자신이 도화지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숨이 멎을 듯한 공포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도화지 속의 그녀가 현실의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뒤로 물러났지만, 도화지 속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치 도화지 속의 그녀가 도화지에서 벗어나 현실로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화지 속의 그녀가 도화지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현실 속 그녀 앞에 섰다. 두 존재가 마주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듯한 강렬한 혼란이 그녀를 휘감았다. 현실의 그녀와 도화지에서 나온 그녀, 두 명의 존재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화지에서 나온 그녀는 현실의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는 네 차례야."


현실의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

"무슨 뜻이야?"


도화지 속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네가 도화지 속으로 들어갈 차례야. 그러면 이해될 거야."


그 순간, 현실의 그녀는 무언가에 강하게 끌려가듯 도화지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것이 빠르게 회전하며 뒤바뀌는 듯한 감각이 그녀를 덮쳤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이 도화지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 도화지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그곳에 갇혀 있었다. 밖에서는 이제 도화지 속에서 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또 다른 그녀가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었다.

도화지 속에서 그녀는 무력하게 바라보며 깨달았다. 도화지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영원히 도화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을 느꼈다.




도화지 속에 갇힌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력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혼란스러웠지만, 점차 현실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마치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 속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존재는 그녀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과 동료들, 그 누구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도화지 속에서 나온 그녀는 도화지를 벽에서 떼어내어 어두운 창고 안에 던져두었다. 빛이 없는 창고 안으로 들어온 도화지 속 세상은 더욱 어두워져 갔다. 빛은 사라지고, 공간이 좁아져 오는 듯한 압박감이 그녀를 덮쳤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도화지 속에서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 기분, 마치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밖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그녀는 점점 더 현실에 적응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진짜처럼 완벽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도화지 속의 그녀는 더 깊은 고립과 절망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무심코 도화지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는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녀는 도화지 속에서 영원히 갇힌 채,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왜 이곳에 있는지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완전히 잊혔다. 도화지 속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녀 자신도 기억하지 못했다. 창고에 던져진 도화지는 먼지에 덮여 생기를 잃은 채로 있었다. 그저 텅 빈 눈동자로 어둠 속을 응시하는, 생명 없는 그림이 되어버린 것이다.

밖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완벽하게 현실 속의 삶을 이어갔다. 아무도,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방 한구석에 걸렸던 도화지는 오래된 기억처럼 희미해졌고, 결국 영원히 잊혔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사라졌다.


작가의 이전글 그해 겨울, 그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