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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Oct 04. 2024

연극이 끝난 후에

 나는 그날 닭꼬치에서 닭고기를 하나씩 빼내며 선배들이 나누는 대화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랜만에 연습 후 선배들 모두가 참석한 자리라, 안주에 집중하면서도 다음 작품이 무엇일지, 생계를 위해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선배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선생님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최 선배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아직도 연극을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딘지 민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가 아닌, 무엇을 버리고 비워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에 흥미가 생겼다. 내가 꼬치에서 닭고기를 모두 빼서 인원수대로 나누고 있을 때, 최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인원수대로 잘 나눴냐?”


닭고기가 하나 모자라서 내가 먹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최 선배가 물었다.


"너는 요즘 뭐 하냐?"

“아웃바운드 하고 있어요. 땅 사라고 전화 돌려요…”


최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 사기나 치지 말고 공부나 해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행히 최 선배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른 선배들은 내가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우리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내가 애써 나눈 닭고기 하나를 집어먹고 소주를 마시는 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나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라는 말이 가슴 깊이 상처로 남았다. 연극 바닥에서 희망도 없이 잡일만 하는 내가 안쓰러워하는 충고라는 걸 알면서도, 남에게 땅을 사라고 부추기는 나 자신을 사기꾼으로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최 선배는 나보다 10년쯤 먼저 연극을 시작했다.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오는 정도였고, 영화에도 잠깐 얼굴을 비췄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불러주는 곳이 없어 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나도 술 한 잔 사줄 여유가 없었다. 다섯 명이서 소주 두 병과 닭꼬치 세 개가 안주의 전부였다.


소주잔 바닥이 드러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잔. 고작 두 잔으로 말라버린 회식자리였다. 눈치만 보며 입맛 다시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최 선배의 얼굴에 멋쩍음이 번졌다. "이제 갈까?" 그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닭기름 묻은 손으로 술 한 모금 못 넘긴 채 극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구멍에 걸린 찝찝함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불빛과 함께 낯선 향기가 쏟아져 나왔다. 얼마 전까지 이곳을 가득 메웠던 관객들의 잔향. 식어가는 땀 냄새와 달콤 쌉싸름한 향수 내음이 뒤엉켜 극장 안을 떠돌고 있었다.


객석에 주저앉아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무대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텅 빈 무대 위로 배우들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허공을 가르는 손짓, 울먹이는 목소리, 분주한 발걸음.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듯했다. 그때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현실과 연극이 뒤섞여 경계를 알 수 없었던 그날. 무대 위의 허구가 내 삶의 진실이 되어버린 그날. 나는 여전히 그날의 혼란 속에 있는 걸까.

고요한 극장에 나 홀로 앉아, 나는 여전히 관객이자 배우로 존재하고 있었다.




2월의 끝자락, 매화 향기가 막 피어오르던 그 해 봄. 스물두 살의 나는 제대 영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군복을 벗은 지 이틀째, 책장 위에 옹골차게 놓인 전공 서적들이 새 학기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설렘은 단 하루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3월 2일 오후 2시 17분. 시계추처럼 규칙적이던 일상이 멈춰 섰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부모님을 검은색 그랜저가 덮쳤다고 했다. 방금 전까지 내 귓가에 맴돌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왜 하필 우리 부모님이었을까. 요란한 경적 소리에 다들 피했다는데, 왜 부모님은 그러지 못했을까.

경찰은 운전자의 과실을 밝혀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93%, 운전대를 잡아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는 급발진을 주장했지만, CCTV는 그의 발이 가속 페달을 꾹 누르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재판이 끝나고 보상금이 통장에 찍혔다. 차가운 숫자들. 부모님의 생명을 돈으로 환산한 결과였다. 그 돈으로 무얼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봄은 왔지만, 내 안의 겨울은 떠나지 않았다. 복학 신청서는 구겨져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의 연락을 받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보험 담당자는 친형처럼 날 챙겨주겠다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사건이 종결'되자 그도 내 곁에서 사라졌다.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달력의 숫자는 바뀌어갔지만, 내 삶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부모님의 빈자리를 메우려 할 때마다 더 큰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매미 소리 요란한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 인생의 봄은 끝났지만,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고 있음을. 아직 그 계절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나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 꿈은 이제 손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 같았다. 누구도 그 길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 역시 그 길을 찾을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지식을 쌓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더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강의실의 풍경이 그리웠다. 빽빽이 들어찬 학생들, 그들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던 그 순간들. 강단에 쏟아지는 조명은 언제나 눈부셨고, 그 빛에 가려 학생들이 앉은자리는 그림자 속에 잠겼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빛을 받으며 강의하는 교수님의 모습은 마치 무대 위 배우 같았다. 그 교수님이 내게 새로운 무대를 소개해주었다. 대학로를 정처 없이 떠돌던 어느 날, 혜화동 로터리 앞 동성고등학교 정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내게 말했다.


"자네에게 딱 맞는 일이 있어. 내 지인이 운영하는 극단인데, 공연 후 정리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어. 자네처럼 연극을 사랑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원한다더군."


교수님의 눈빛은 따뜻했다. 그는 내 상황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당분간 마음을 추스르며 조용히 지내는 것도 좋을 거야. 게다가 공연도 볼 수 있으니 자네에겐 안성맞춤일 걸세. 보수도 나쁘지 않다니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나?"


다음 날 아침, 나는 옷가지 몇 벌과 세면도구를 가방에 던져 넣었다. 떠나기 전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텅 빈 공간이 가슴을 옥죄었다. 더 이상 이곳에 나를 기다리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마음 한구석엔 알 수 없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극단은 대학로 중심가에서 벗어난 곳에 있었다.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곳에 낡은 벽돌 건물이 서 있었다. 유독 밝은 노란 조명만이 이곳이 극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나를 부르는 듯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벽면에는 공연 포스터들이 빼곡했다. 열정 넘치는 배우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 아래 낡은 벽지는 이곳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계단 끝 작은 대기실에 들어서자 오래된 소파와 탁자, 그리고 벽에 걸린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배우들은 달랐지만, 배경은 언제나 이 작은 무대였다.


무대는 생각보다 작았고, 관객석의 의자들은 다 낡아 보였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었다. 그의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이 극장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실례합니다. 박 교수님 소개로 왔습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 청소하러 오셨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연출이자 대표입니다."


그의 초라한 모습과 달리 당당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나에게 일과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공연 전 에어컨 가동, 의자 청소, 앞자리부터 채우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 외벽의 노란 조명을 켜두는 일. 그 빛은 이 극장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신호였다.


밤이면 대표는 텅 빈 극장을 찍곤 했다. 그의 카메라에는 노란빛에 물든 적막한 골목, 그리고 관객이 떠난 빈 객석이 담겼다.


"역시 연극이 끝난 후의 여운이 좋아요." 그의 말에는 묘한 감흥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나 역시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그래서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그것은 강박이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적막은 때로 나를 덮쳤다. 북적이는 관객들 사이에 있고 싶었지만, 내 자리는 언제나 무대 뒤편이었다. 텅 빈 대기실에 홀로 남겨질 때면 그 고요함이 나를 삼킬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점점 이 공간과 하나가 되어갔다. 극장의 숨소리를 듣고, 그 공간을 돌보는 일이 나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동시에 이 고요 속에서 나는 내면과 마주하게 되었다. 극장은 내게 피할 수 없는 고독을 안겨주는 동시에,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시간은 무겁게 흘렀다. 하지만 나는 그 무게를 조금씩 감당해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새로운 시작, 새로운 무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가을, 바람이 서늘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극장에 도착해 늘 하던 대로 청소를 하고, 공연 준비를 마치고 나니 평소와 다르게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대 뒤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곧이어 대표가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큰일 났어! 주인공 옆에서 연기할 배우가 무대 장치에 걸려 넘어졌어. 다리를 다쳐서 당장 병원에 가야 해."

나는 그저 극장의 뒷정리를 하는 사람이었고, 무대 위에 설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표가 갑자기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이상한 제안을 했다.

"너... 혹시 말 울음소리 흉내 좀 내볼 수 있어?"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히힝~" 하고 소리를 내보았다. 대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완벽해! 네가 무대에 설 거야. 복잡한 연기는 필요 없어. 그냥 주인공 옆에서 말 울음소리만 내면 돼. 아, 그리고 이거 입고."


대표는 대본도 설명도 없이 나에게 의상을 건넸다. 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간소했다. 그것은 말 가면과 티 팬티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공연이 곧 시작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옷을 모두 벗고 티 팬티 한 장만 입고 가면을 썼다. 말 가면을 머리에 얹고 나니, 마치 이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들었다.

무대 뒤에서 들리는 소음은 멀어지고, 가면 속에서 나는 마치 또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 자신이 아닌, 말이 된 듯한 기분. 그 감각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나를 지배해 갔다.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한 마리의 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조명이 쏟아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순간부터 이미 나는 말이 되어 있었다. 주인공의 첫 발걸음과 함께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말의 역할은 단순했다. 주인공이 어디로 가든 그의 곁을 지키는 것. 그의 그림자처럼, 때론 그의 분신처럼 움직이는 것. 대사 한 마디 없이 오로지 몸짓으로만 존재를 드러내는 것.


처음엔 어색했다. 네 발로 걷는 듯한 동작, 고개를 들어 코를 펄럭이는 시늉, 꼬리를 휘휘 젓는 몸짓. 그러나 점점 그 움직임에 익숙해져 갔다. 주인공의 호흡에 맞춰 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가 슬퍼할 때면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고, 그가 기뻐할 때면 힘차게 앞발을 들어 올렸다. 


말 가면 속 세상은 달랐다. 좁은 시야로 보이는 관객들의 모습은 흐릿했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면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그들의 숨소리, 웃음소리, 때론 훌쩍이는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웃음을 터뜨렸고, 또 다른 이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내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객석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고, 내가 주인공을 위로하듯 머리를 비빌 때면 관객들의 숨소리가 잠시 멎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나를 더욱 말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그들의 웃음은 나를 더 생동감 있게 만들었고, 그들의 눈물은 나를 더 섬세하게 움직이게 했다.


무대 위에서 흐르는 시간은 달랐다. 때론 한없이 길게 느껴지다가도, 어떤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주인공의 독백이 이어질 때면 나는 무대 한편에서 그저 존재할 뿐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나의 몸짓은 멈추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거나,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점점 나는 말이 되어갔다. 아니, 어쩌면 말의 모습을 한 또 다른 나를 발견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면 속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땀방울에 나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관객도, 무대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공간 속에서 숨 쉬는 한 마리의 말로 존재할 뿐이었다. 주인공이 마지막 대사를 읊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객석에서 터져 나온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나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가면을 벗자 차가운 공기가 내 얼굴을 스쳤다. 눈을 깜빡이며 객석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눈물 흘리며 미소 짓는 수많은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의 박수 소리가 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나는 돌아갈 수 없다고. 이 무대, 이 가면, 그리고 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가면 속에서 나는 몰래 관객들을 훔쳐보았다. 가면이 주는 익명성 덕분에 자신감을 느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에게는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겉모습을 숨긴 채,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막이 내리고 객석이 텅 빈 후에도, 나는 여전히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가면 속에 갇힌 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지막 관객의 발소리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천천히 무대 뒤로 걸음을 옮겼다.


대표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잘했어. 이제 네가 무대를 경험했으니, 뭔가 달라질 거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면을 벗었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현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해 있었다. 무대는 더 이상 그저 바라보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내가 숨겨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곳,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나는 끝없이 펼쳐진 무대 위를 달리고 있었다. 때론 말이 되어, 때론 나 자신으로.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새벽 풍경이 어제와는 다르게 보였다. 모든 것이 무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침 일찍 대표가 나를 불렀다. 대학로 어귀의 오래된 분식점, 여전히 손님 하나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마주 앉았다. 식은 떡볶이를 앞에 두고 대표가 말을 꺼냈다.

대표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연극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지 않아?"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표는 내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먹고 자며 연기 연습도 하고, 극단 일도 도와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배우가 되어 있을 거야."

잠시 말을 멈춘 그가 한숨을 쉬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사실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 다음 달에 일본 출장을 가야 하는데, 한 달 정도 집을 비우게 돼. 그동안 우리 집도 좀 봐줄 수 있겠나? 물론 그에 맞는 보수는 더 쳐줄 테고."


대표의 눈에서 미안함과 기대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의 제안은 단순한 일자리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비밀스러운 초대장 같았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연극인가, 청소부인가.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져 있음을.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그저 '존재'하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은 간단했지만, 그 대답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 후 나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른 아침, 극단의 작은 숙소에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거울을 보는 것이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후엔 극장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먼지를 털어내는 손길에 어제의 공연이 묻어났다.

오후가 되면 연습이 시작됐다. 작은 배역이었지만, 대사 한 마디, 동작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긴장과 흥분은 나를 살아있게 했다. 밤늦게 연습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누우면, 온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연극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커져갔다. 과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게 정말 연극인가, 아니면 그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뿐인가?


한 달이 흘렀다. 대표의 일본 출장이 다가왔다. 그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25층, 그 높이만큼이나 내 마음도 아찔했다. 문을 열자 12살 남자아이가 나를 맞이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맡은 새로운 역할은 배우도, 청소부도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


대표는 떠나기 전 몇 가지를 당부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새로운 대본처럼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를 느꼈다.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던 역할인가? 무대 위 주인공에서 갑자기 12살 소년의 보호자로. 내 인생의 시나리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정말 이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12살 아이와 나,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대표가 떠난 후,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빛이 반짝이는 그 풍경이 마치 객석의 불빛처럼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이 넓은 아파트가 바로 나의 새로운 무대라는 것을. 주인공은 저 방에서 잠들어 있는 12살 소년.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의 말 없는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이리라. 내가 말이었듯이.


가슴이 뛰었다. 감동할 일도, 흥분할 일도 아닌데, 내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제껏 나는 무대 위에서 주어진 대사를 읊고,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대본도 없고 리허설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공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나는 소년의 방문 앞에 서서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열면 그곳에는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이다. 손잡이를 잡은 내 손이 떨렸다. 이것이 진정한 연기구나. 가면도, 분장도 없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내는 것.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이란 끝없는 연극이고, 우리는 모두 그 무대 위의 배우일지도 모른다고. 매 순간이 새로운 장면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을 맡아가는 것이라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며, 나는 다짐했다. 이 역할 잘 해낼 것이라고.

아이의 방문을 조용히 열어보았다. 그의 평화로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짐했다. 이 역할, 그리고 앞으로 주어질 모든 역할들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리라고. 그것이 연극이든, 현실이든 상관없이.



대표는 열쇠를 건네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의 눈빛에 담긴 믿음이 나를 짓눌렀다.


"민석이는 말수가 적지만 착한 아이야. 주말 학원, 저녁 숙제 체크는 꼭 부탁해. 그리고..."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가끔 사진 좀 보내줘. 특히 거실 쪽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를 배웅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25층 주상복합의 넓은 공간이 갑자기 좁게 느껴졌다. 낯선 인테리어, 그리고 더 낯선 12살 소년 민석. 우리의 첫 저녁은 어색함 속에 흘러갔다. 서툰 솜씨로 만든 볶음밥 위로 침묵만이 떠다녔다.

다음 날, 민석이의 등굣길에 말을 걸었다.


"학교는 어때?"


돌아온 건 고개 끄덕임뿐. 그 뒤로 드리운 그림자가 마음에 걸렸다.

밤이 되어 숙제를 도와주며 민석이를 관찰했다. 수학 문제를 푸는 손가락의 떨림, 시계를 향한 불안한 눈길. 그 모든 것이 나를 닮아 있었다.


"삼촌, " 민석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도 삼촌처럼 수학을 잘 풀었어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민석이의 눈에 맺힌 그리움이 나를 찔렀다. 


"그랬구나. 엄마가 자랑스러웠겠네."


내 말에 민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그날 밤, 대표의 요청대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불 켜진 아파트 전경, 정돈된 거실, 식탁 위 식사 준비, 그리고 민석이의 뒷모습. 셔터를 누를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너머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자 민석이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들도 눈에 띄었다. 한밤중에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아침이면 어제와 다른 위치에 놓인 거실의 물건들.

어느 날 밤, 민석이가 내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삼촌, 엄마가 왔어요."


놀라 일어나 민석이 방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창가에 놓인 액자 속 여인의 미소가 달빛에 반짝였다.


"민석아, 꿈꾼 거 아닐까?"


민석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분명히 봤어요. 엄마가 저를 안아주셨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석이의 눈빛은 진실해 보였다. 그리고 방 안에 은은히 퍼진 향수 냄새. 나는 그제야 대표가 왜 사진을 보내달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욱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민석이를 지키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진짜 역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거실에 앉아 어둠을 응시했다. 때때로 바람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민석이 잘 지키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집에, 이 가족에 내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내게도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민석이의 불안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 그의 방 앞 소파에서 잠들기로 했다.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순간,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졌다. 살갗이 오소소 떨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복도 끝에서 흰 실루엣이 나타났다. 처음엔 눈의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형체는 점점 선명해졌고, 여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긴 검은 머리카락, 하얀 원피스, 그리고 맑은 미소.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데, 그녀가 천천히 민석이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그녀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민석이의 방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들, 많이 컸구나."

그 목소리는 바람 같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선명했다. 이어서 들려오는 민석이의 대답.

"엄마, 정말 엄마 맞아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있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 방 안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용기를 내어 문을 살짝 열었다. 그 순간 보인 광경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민석이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반투명한 모습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윤곽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민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그 손길이 민석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몸을 숙여 민석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방 안에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라일락 향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고, 그 찰나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방 안에는 민석이만 홀로 남아있었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달빛에 반짝였다.


"삼촌..." 민석이가 나를 발견하고 불렀다. "엄마가 다녀가셨어요. 믿어주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 남아있는 라일락 향기가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라일락 향기가 사라진 후에도, 그 밤의 기억은 내 안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정말 그 모든 것이 실제였을까? 아니면 나와 민석이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일까?


불안감에 휩싸인 채, 나는 결단을 내렸다. 다음날 밤, 노란 취침등만을 켠 채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민석이의 평온한 숨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가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요동쳤다.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계절을 무시한 듯한 두꺼운 외투,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긴 머리카락. 그녀는 말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향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화면 속에 담긴 그녀의 뒷모습은 흐릿하면서도 선명했다. 망설임 없이 대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음 날 아침, 대표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말... 고마워.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거야. 민석이 엄마의 모습을..."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 속에 대표의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며칠 후, 대표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나는 조용히 그의 집을 나섰다. 극단으로 돌아와 일상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그 집에서의 경험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연습이 끝난 후 대표가 나를 불렀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보내준 사진...."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가의 주름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처음엔 그녀를 보내는 게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빈 공간만 찍었지. 집에서도, 극단에서도, 그녀가 없는 세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네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깨달았어. 그녀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는 걸.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도, 그녀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대표의 눈에 맺힌 눈물이 무대 조명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이 우리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연극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무대 위의 연기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거대한 그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밤 커튼이 내려올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는 모두 배우이자 관객이라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라일락 향기가 무대를 감쌀 때면,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가을의 끝자락, 극단의 낡은 무대에 서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작은 배역에 불과했지만,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소곤거림이 내 심장 소리와 뒤엉켰다.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객석을 향한 첫 시선에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맨 앞줄 중앙에 부모님이 앉아 계셨다. 그 옆으로 대표와 민석이, 그리고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모습의 민석이 엄마까지. 그들 모두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현실일까, 환상일까.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무대 위에서 나는 대사를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객석으로 날아가 있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눈빛, 대표의 믿음 가득한 표정, 민석이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그의 엄마의 은은한 미소. 그 모든 것이 나를 감싸 안았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이 내려왔다. 나는 숨을 고르며 다시 객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라일락 향기가 희미하게 무대를 감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을. 내가 무대 위에 선 그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영원히.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극단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더 이상 두려움도, 불안도 없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힘만이 가득했다. 눈을 감으며 나는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내 안에 있겠지만, 이제 그것들은 나를 짓누르는 무게가 아닌 나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꿈속에서 나는 다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이번엔 주인공이었다. 객석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보였다. 알고 있는 얼굴들, 모르는 얼굴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얼굴들까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알았다. 이제 나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연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니 인생이라는 더 큰 무대 위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새벽빛이 창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의 첫 연습을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다."


무대 막이 오르고,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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