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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Dec 15. 2024

소설 쓰는 남자

단편소설

창백한 형광등이 깜빡일 때마다 방 안의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천장 구석에 매달린 형광등은 마치 썩은 이빨처럼 누런빛을 흘리고 있었다. 벽에 붙은 달력은 3개월 전에서 멈춰있었다. 9월 15일, 그의 마지막 데드라인이었던 날짜에 붉은 동그라미가 피맺힌 상처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로 수많은 날짜들이 까맣게 그어져 있었다. 9월 16일, 17일, 18일... 더 이상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한 듯 마지막 며칠은 그저 거칠게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8평 남짓한 원룸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방 한편에 놓인 좁은 침대는 이불이 뒤엉켜 있었고, 베개는 땀과 기름때로 얼룩져 있었다. 침대 밑으로는 먹다 남은 과자봉지들이 구겨진 채 밀려들어가 있었다. 싸구려 중국집 자장면 그릇 위를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고, 구석에 버려진 우유팩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와 커피 얼룩이 뒤섞여 있었고, 휴지통은 이미 넘쳐 쓰레기들이 사방으로 흘러넘쳐 있었다. 처음 2주 동안은 매일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중국집, 치킨, 피자... 배달원이 올 때마다 "곧 마감이에요."라고 중얼거리며 음식을 받았다. 한 달이 지나자 배달음식도 줄었다. 대신 컵라면과 초코파이가 방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창밖의 단풍이 물들고 떨어지는 동안, 커튼으로 꼼꼼히 가려진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이 바깥세상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90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수염은 자랐고, 머리카락은 기름졌다. 처음 한 달은 매일 아침 면도를 했고, 이틀에 한 번은 샤워도 했다. 두 번째 달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제는 언제 마지막으로 씻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쌓여가는 배달음식 그릇들에서 풍기는 썩어가는 음식 냄새, 며칠째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나는 땀 냄새, 그리고 곰팡이 핀 벽지에서 스며 나오는 습한 냄새가 뒤엉켜 역겨운 악취를 만들어냈다. 책상 위로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민들레는 시들어 말라죽었다. 달력에 표시된 마지막 날, 어머니가 사다 준 그 민들레는 아직도 푸르렀다. 하지만 물을 주는 것을 잊은 지 오래. 노란 꽃잎은 갈색으로 변해 책상 위로 떨어져 있었다. 천장 모서리에는 거미줄이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검은 거미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 다녔다. 형광등 불빛에 거미줄이 반짝일 때마다 그것은 마치 남자의 이야기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실타래 같았다.


방 한편에 놓인 좁은 침대는 이불이 뒤엉켜 있었다. 베개는 땀과 기름때로 얼룩져 있었고, 침대 밑으로는 먹다 남은 과자봉지들이 구겨진 채 밀려들어가 있었다. 싸구려 중국집 자장면 그릇 위를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고, 구석에 버려진 우유팩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와 커피 얼룩이 뒤섞여 있었고, 휴지통은 이미 넘쳐 쓰레기들이 사방으로 흘러넘쳐 있었다.


"음. 완벽한 결말이야."


남자의 눈동자는 광기로 빛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며칠째 갈아입지 않은 옷.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모니터 화면에는 수천 개의 문서가 열려있었다. 각각의 문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곧 완성돼...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는 거야..."


그는 중얼거리며 모니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첫 번째 문서의 주인공은 연쇄 살인마를 쫓는 형사였고, 두 번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녀의 이야기였다. 세 번째는 외계인의 침공을 다룬 SF였다. 겉보기에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밥 먹어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조금만 기다려요. 이것만 쓰면 돼요."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떠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아니, 어쩌면 오후 3시일지도 모른다. 창문이 가려진 지 오래되어 낮과 밤의 구분조차 모호해졌다. 책상 위의 형광등만이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깜빡거렸다. 처음엔 단순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정도였다. 그저 작가로서 캐릭터에 깊이 몰입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컴퓨터 화면이 깜빡거렸다. 그 순간, 첫 번째 소설의 형사가 화면 속에서 걸어 나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는 그의 손길이 실제로 느껴졌다. 담배 냄새도 코끝을 찔렀다. 환각일까, 현실일까. 그 경계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버렸다.


"이제 그만하시죠." 


형사는 하루 종일 잠복근무를 한 듯 피곤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러다 당신도 제가 쫓는 그놈처럼 될 수 있습니다. 15년 동안 연쇄살인마를 쫓다 보니 알아요. 집착은 사람을 서서히 갉아먹죠."


"아니야, 멈출 수 없어. 당신도 알잖아요.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두 번째 소설의 주인공 채유진이 달빛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얼굴의 열여섯 살 소녀는 언제나처럼 보라색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항상 왼손으로 모자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작가님..." 병실 생활이 길어져 생긴 습관처럼 조용한 목소리였다. "할머니의 일기... 정말 치료법이 있을까요? 선생님들은 모두 안 된다고 하시는데..." 

말끝마다 힘없이 흐려지는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는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도윤이 등장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9시 비행기예요!" 


검은색 정장에 은색 넥타이를 맨 도윤은 시계를 확인하며 초조하게 서성였다. 항상 그랬듯이 완벽하게 다려진 옷차림이었지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그의 불안을 드러냈다.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습관은 중요한 계약을 앞둘 때마다 나타나는 그의 특징이었다.


"홍콩 지사와의 계약이 깨지면..." 도윤은 말끝을 흐렸다. 평소의 단정한 말투가 흔들렸다. "아내의 수술비를... 제발 시간을..."


다섯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시간여행자 지안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하얀 실험실 가운 차림이었고,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가 급한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손에는 복잡한 수식이 빼곡히 적힌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교수님!" 지안은 말할 때마다 허공에 수식을 쓰는 듯한 손짓을 했다. 과학자다운 정확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시간의 균열이 서울 상공의 47.3% 지점까지 확장됐어요. 이론상 붕괴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3시간 27분입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뒤엉켰다. 형사의 묵직한 발소리와 담배 찌는 소리, 유진의 작은 기침 소리, 도윤의 구두 소리와 시계 확인하는 소리, 지안의 태블릿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출판사였다.


"작가님, 원고 마감이 3개월이나 지났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


남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도윤이 지금 막 비행기를 탔으니까요. 곧 성과가 나타날 거예요. 도윤이 홍콩에서 계약을 성사시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 계약이 성공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작가님... 잠시 쉬시는 게 어떠세요? 그리고 병원에도 한번 가보셨으면 해요. 제가 좋은 정신과 선생님을 알고 있는데..."


출판사와의 통화 중에도 남자의 시선은 흔들렸다. 전화기 너머 편집장의 목소리와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현실은 어느 쪽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소설 속 세계가 더욱 선명해졌다. 방 안의 공기는 이제 두 개의 현실이 뒤섞인 듯했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형사의 발소리가 위층 주민의 발소리와 구분되지 않았다. 시한부 소녀의 병실 소독약 냄새가 방 안의 곰팡이 냄새와 뒤엉켰다. 외계인 우주선의 푸른빛이 달빛과 하나가 되어 방을 채웠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현실의 조각들이 부서져 내렸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시간의 균열음으로 들렸고, 창가에 맺힌 빗방울은 우주선의 신호등처럼 깜빡였다.

남자는 이제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창조한 이야기들이 현실이 된 것일까, 아니면 현실이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책상 위의 항정신성 약물은 그 답을 알고 있는 듯했지만, 그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사라질까 봐,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의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망상일까, 현실일까. 이제는 그것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귀에는 더 이상 출판사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섯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시간 여행자 지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시간의 균열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빨리 결정을 내려주세요!"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액정을 통해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화면이 깜빡일 때마다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손가락 끝에서 현실과 소설이 뒤섞였다. 형사가 쫓는 연쇄 살인마의 가쁜 숨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고, 시한부 소녀의 힘겨운 기침 소리가 에어컨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렸다. 외계인들의 우주선은 창 밖 달빛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숨 막힐 듯 답답했다.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먼지 낀 책상 위에서 춤추었다. 쌓여있는 라면 용기에서는 썩어가는 국물 냄새가 올라왔고, 구석에 버려진 우유팩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남자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모니터 속 세계가 생명력을 얻었다. 첫 번째 소설 속 형사는 15년간 추적해 온 연쇄살인마의 목덜미에 수갑을 채웠고, 두 번째 소설의 시한부 소녀는 할머니의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한약 처방전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시작했다. 세 번째 소설 속 외계인들은 지구의 과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문명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교수님! 시간이 없어요!" 

지안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 그의 소설 속에서 시간의 균열은 이제 서울 상공까지 번져나가고 있었다.


"알아... 알고 있어..."

남자는 중얼거렸다. 손가락 관절이 붓고 시큰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도윤은 지금 홍콩 상공을 날고 있었고, 그의 계약 성사 여부가 또 다른 이야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었다.


책상 위 약병이 달빛에 반짝였다. 'Risperidone 2mg'이라고 적힌 라벨이 그를 비웃듯 빛났다. 3주 전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조현병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의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제는 아주 가깝게 들렸다. 등 뒤에서 어머니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쉬었다가 약을..."


"안 돼요!" 

남자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약을 먹으면 이야기가 사라져요. 도윤이도, 지안이도, 모두가 사라진다고요. 어머니마저도..."


그때였다. 모니터가 깜빡이더니 완전히 꺼졌다. 정전이 아니었다. 노트북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새까만 화면 속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충혈된 눈, 헝클어진 머리카락, 며칠째 깎지 않은 수염...

모니터가 꺼지자 방 안의 모든 경계가 무너졌다. 형사의 발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가 하나가 되었고, 소녀의 기침 소리와 에어컨 바람 소리가 뒤섞였다. 시간의 균열은 이제 그의 정신 속으로 번져갔다.


"안 돼... 안 돼..." 


남자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도윤아! 지안아! 어디 있어?!"


방 안이 갑자기 너무 조용해졌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형..." 동생이었다. 동생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남자는 까만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소설은 계속된다. 끝나지 않을 이야기..." 


그리고 처음으로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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