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정신없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 보고 나왔는데 그제야 여자 화장실이었음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차가운 수돗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씻었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부끄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해괴한 경험을 한다. 나중에 생각하면 사실인지 꿈을 꾼 것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그런 경험 말이다. 마치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희미하고 모호한,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 순간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해간다. 사람들은 그 기억의 한 조각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떠들고 다닌다. 처음에는 작은 씨앗 같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며 차츰 살을 붙인다. 마치 눈덩이처럼 굴러가면서 점점 커지더니, 결국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변모해 스스로도 그것이 진실이라 믿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얘길 지금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기억의 덮개를 열기가 꺼려진다. 마치 오래된 다락방의 먼지 쌓인 상자를 열면 검은곰팡이라도 잔뜩 피어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혀끝까지 올라왔다가도 다시 삼켜버린 이야기, 그것은 마치 미완성된 퍼즐처럼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나는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 얘길 입에 올리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보다는 아무도 안 믿어줄 것 같아서 그랬다. 때로는 진실이 거짓보다 더 비현실적일 때가 있으니까. 어쩌면 나는 그 기억의 진정성이 다른 이들의 의심 속에서 희석되는 걸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있었다. 군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몸에는 긴장이 남아있었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이런저런 일에 아직은 호기심을 느끼던 때였고, 그 당시는 마침 '성우'라는 직업세계에 이끌리고 있었다. 밤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외화 더빙을 들으며 가슴이 설렜다. 한국어로 흘러나오는 톰 크루즈의 목소리, 줄리아 로버츠의 대사들이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광고에서 들리는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음성은 마치 마법사의 주문 같았다. 그 목소리들은 내 귀에 달콤한 독이 되어 스며들었고, 결국 방송국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운이 좋았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어느 지역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작업이었는데, 화면 속 여자 리포터의 행동을 지켜보며 속도를 맞춰 대본을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이 일이, 내게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문턱 같았다.
모니터 속 여자가 웃을 때면 나는 "리포터가 환하게 웃으며"라고 읽어야 했고, 그녀가 갑자기 카메라 쪽으로 다가올 때면 "리포터가 시청자를 향해 걸어옵니다"라고 전해야 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대본대로 읽는 것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어둑한 더빙실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다 보면, 이상한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마치 내가 명령하는 대로 그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가 먼저 나가고 그녀가 그 동작을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일 때면,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실로 그녀를 조종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가끔은 더빙실을 나서면서도 그 묘한 감각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달콤한 환각제와도 같아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 사소한 착각이 내 인생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게 될지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모니터로만 봐오던 그 리포터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방송국 구내식당의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였다. 화면 속에서만 보던 그녀가 실제로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모니터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는 평균 정도였고, 동그란 얼굴에 하얀 피부를 가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의 습관이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길 때면 갑갑하다는 듯 길고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재빨리 빗어 넘긴 곤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목소리는 밝고 높은 톤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리포터 훈련과정에서 습득한 전문가다운 말하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그날 우연히 발견한 그녀의 또 다른 면이었다. 복도에서, 로비에서, 그리고 편집실 앞에서. 그녀와 나누는 짧은 대화들이 쌓여갈수록 나는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카멜레온처럼 상대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방송 중이거나 국장, PD들과 대화할 때면 웃는 얼굴에 톡톡 튀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다가도 나와 단둘이 마주하면,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차분하고 낮아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목소리 속에 담긴 어둠이었다. 밝고 경쾌한 방송용 목소리 이면에 감춰진 그림자 같은 것. 때로는 그 어둠이 지나치게 깊어 보여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매일 모니터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목소리로 읽어주는 남자라는 걸. 우리의 관계는 묘했다. 나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내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운명인가 봐요."
그녀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서, 목소리는 다시 한번 변했다. 이번에는 특유의 밝음으로 빛났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밀스러운 떨림이 감돌았다. 형광등 아래서 반짝이던 그녀의 미소를 보며,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미소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정말 운명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정교하게 짜놓은 함정일까. 어느 날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평소와는 다른, 어딘가 설레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가 나가는 모임이 있는데 나오실래요?"
"모임요?"
"소리 내서 책을 읽는 모임이에요. 목소리가 좋으셔서 꼭 같이 하고 싶어요."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마치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주 일요일 2시에 대학로 4번 출구 앞에 코끼리 분식집으로 오세요. 들어오셔서 2층으로 올라오시면 우리가 있을 거예요. 꼭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에는 없던 달콤한 강요가 묻어있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승리의 미소처럼 보였다가, 순간 착각이었나 싶었다. 그날 저녁,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혜화동 로터리를 거닐었다. 늦여름의 따스한 햇살 아래, 우리는 방통대까지 올라가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계속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리고는 작은 극장에서 연극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배우들이 등장하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앗아간 것처럼, 배우들은 하나같이 대사를 잊어버렸다. 무대는 기이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가 객석을 향해, 아니 어쩌면 나를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 순간 검은 막이 내려왔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밤중, 꿈에서 깬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새벽의 푸른빛이 모니터에서 쏟아져 나왔다.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는 화면 속에서 '대학로 책 읽기 모임'을 검색했다. 수많은 모임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인증받은 분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라는 신비로운 문구로 시작되는 모임. 모임의 이름은 "load to book". 그 이름은 마치 수수께끼처럼 의미심장해 보였다. 초기화면에는 환한 달빛 속에서 토끼가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읽는 자에게만 길이 열릴 것이다'라는 암호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게시판은 마치 비밀결사단체처럼 폐쇄적이었다. 가입 인사 외에는 모든 게시글이 정회원만 볼 수 있게 잠겨있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힌 채 한동안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화면 속 달빛 아래 책 읽는 토끼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서둘러 화면을 닫았다. 그리고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방금 본 것들이 모두 지워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토끼의 눈빛은 꺼진 화면 속에서도 계속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꺼림칙함이 밤공기처럼 차갑게 번졌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일요일 오후 2시,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왔다. 늦여름의 햇살이 아스팔트에 부서져 반짝였다. 정면으로 걸어가니 마치 오래된 등대처럼 빨간색 YMCA 건물이 보였고, 그 길 건너편에서 '코끼리분식'이라는 낡은 간판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간판의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가 마치 지도처럼 보였다. 분식집 입구는 70년대에 멈춰 선 듯했다. 문을 열자 익숙한 김치볶음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학생 시절 자주 들르던 곳이었지만, 오른쪽에 보이는 2층으로 향하는 나무계단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가운데가 살짝 휘어진 계단은 발걸음 소리를 크게 울리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계단을 반쯤 올랐을 때, 위층의 광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마치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 낮은 천장 아래, 대략 7명 정도의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백열등 불빛 아래서 어룽거렸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야 할 정도로 낮은 천장은 마치 무거운 비밀을 품고 있는 것처럼 답답해 보였다. 그곳은 창고로 쓰이다가 버려진 듯한 공간이었다. 가구라고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낡은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 위에는 누군가의 일상을 짐작케 하는 개킨 이불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가게 주인의 새우잠을 위한 공간이었으리라. 그 광경이 왠지 모를 쓸쓸함을 자아냈다. 천장에 달린 백열등은 마치 숨 쉬듯 깜빡거렸다. 그 불안정한 빛 아래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져 일렁거렸다. 흐릿한 불빛은 언제 꺼질지 모를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계단 위에 서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 한편에서 묘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곳이 정말 책 읽기 모임이 열리는 곳이 맞는 걸까? 그리고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뒤돌아 나가고 싶은 충동과 호기심이 동시에 마음을 잡아당겼다.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나는 잠시 그 어정쩡한 순간에 갇혀있었다. 마침내 계단을 다 오르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은,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어머, 오셨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저기... 소개할게요. 이분은 제가 말씀드린 성우 남 상윤 씨입니다."
순간 일곱 개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각기 다른 얼굴들이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한결같이 예의 바른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 너머에는 뭔가 다른 것이 숨어있는 듯했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그런 기색이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안녕하세요. 전 남 상윤이라고 합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식 성우는 아니고 아르바이트로 방송국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였다. 구부정한 천장 아래 앉아있던 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분명 이 모임의 리더일 터였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의 존재감은 이 답답한 공간마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건조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눈이었다.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 그 눈이 나를 향할 때마다 마치 작은 금속 조각이 반사하는 것 같은 차가운 빛이 일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미소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가면 같았다. 그 미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백열등이 한번 깜빡였다. 그 순간 나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고양이처럼 번쩍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평범한 눈동자였다. 등줄기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게 다 피곤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 낡은 다락방의 분위기 때문일까?
"자, 그럼 오늘 신고식 겸 환영식으로, 신입 회원분이 성우의 목소리로 낭독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푸른 눈의 리더가 말을 마치자마자 일곱 쌍의 손이 동시에 움직였다. 박수 소리가 낮은 천장에 부딪혀 이상하게 울렸다.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한 그들의 일사불란한 동작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책을 건넸다. 표지에는 낯익은 그림이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보았던 그 달빛 속의 토끼였다. 'load to book'이라는 글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손끝으로 표지를 만지자 이상하게도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펼쳤다. 눈앞에 펼쳐진 글자들은 마치 고대 주술서에나 나올 법한 문장들이었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이미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하늘의 기운이 내려온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 방송국에서 자신 있게 읽어내던 그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너와 나의 연결,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우주의 기운을 받들라. 뜻을 거역하면 죄를 받을 지어니..."
한 글자 한 글자 더듬거리며 읽어내려갔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의 저주를 읽는 것만 같았다.
"회원님,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리더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묻어났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항복 선언 같았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더는 이내 묘한 미소를 띠며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검은 바닷속에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깊어졌다. 마치 실제로 깊은 바닷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울림이 있었다.
"퍼붓는 빗줄기, 쏟아지는 파도 속에서 있습니다. 괴수의 혓바닥은 우리를 삼켜버리려 하고 있고. 나침반마저 제멋대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기계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모두가 대답했다.
"주인님"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로 합쳐져 이 답답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흐릿한 백열등 아래서 그들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났다. 나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이게 무슨 광기 어린 의식이란 말인가?
"여기는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나는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고, 마치 기도를 하듯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어 한순간 오한이 들었다. 리더의 연설이 끝나자, 일곱 명의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프로그램이 실행되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테이블을 2열 종대로 재배치하는 그들의 동작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마치 수백 번이고 연습한 듯했다. 곧 아래층에서 주문한 떡볶이와 순대가 올라왔다. 매운 떡볶이 냄새가 이 기이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음식을 먹으며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말을 꺼낸 건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었다.
"저는 이제 행복합니다. 주인님을 만나기 전에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죠. 매일 아침 일어나면 창밖의 새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저는 웃을 수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공허해 보였다.
두 번째는 까만 후드티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저... 저는..." 그는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아악! 으아악!"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비명을 이해한다는 듯했다.
세 번째로 나선 건 깔끔한 원피스를 입은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계셨죠. 저는 늘 혼자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여기...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째는 수수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었다.
"회사에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죠. 하지만 주인님을 만난 후로는 달라졌어요. 이제는 그들이 저를 괴롭힐 때마다 웃을 수 있어요. 그들은 모르겠죠.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의 눈빛에서 이상한 광기가 번쩍였다.
다섯 번째 여성은 화려한 메이크업 아래 창백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저는 완벽해졌어요. 주인님 덕분에... 더 이상 거울 속의 괴물이 저를 쫓아오지 않아요. 이제는 제가 그 괴물을 쫓아가죠."
그녀가 웃을 때마다 립스틱이 번진 입술이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여섯 번째 발표자는 마른 체구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세상이 저를 버렸어요. 하지만 주인님은 달랐죠. 주인님은 저를 받아주셨어요. 이제 저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곧... 모두가 보게 될 거예요."
그의 말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지막 발표자는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던 노인이었다.
"나는 오래 살았다. 하지만 진정한 삶은 이제야 시작됐지. 주인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 그 길만이 진리다."
각자의 고백이 이어질 때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동시에 반응했다. 웃을 때는 함께 웃었고, 울 때는 함께 울었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이건 단순한 독서모임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다른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푸른 눈의 리더가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백열등 아래서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번쩍였다.
"남 상윤 씨는 어떠신가요?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느낀 점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숨어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일곱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들의 시선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대답을 망설이는 내 얼굴에 백열등의 불빛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시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리더는 여전히 그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띤 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나는 마치 익사하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문득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저는... 최근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거짓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마른 사막에도 벼락이 친다는 사실을요. 신이 노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비친 것처럼, 그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까만 후드티를 입은 젊은 남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사막에도 벼락이 친다고요?"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관심을 보였다. 화려한 메이크업의 여성은 입술을 살짝 떨며 속삭이듯 말했다.
"주인님의 노여움이... 사막까지 번지는 건가요?"
하지만 리더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시선이 마치 레이저처럼 나를 꿰뚫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어디서 들으신 건가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거짓말은 여기까지였다.
"사실... 신문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사막의 건조한 모래가 마찰을 일으켜 정전기가 발생하고, 그게 번개를 일으킨다고..."
내 고백이 끝나자 방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열등이 한번 크게 깜빡였다. 잠시 어둠이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들의 눈동자가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리더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웠다.
"과학적 사실이군요.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다르니까요."
그의 말이 끝나자 다른 회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 오한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리더는 내 고백에 대해 더 캐묻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한순간 날 스캔하듯 훑더니, 판사가 최후 변론을 정리하듯 말했다.
"어찌 되었건, 그건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확신이 담겨있었다. 마치 내 거짓말 속에서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그 순간의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지자,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오늘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여기는 정확히 뭐 하는 모임인가요? 저는 책을 읽는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무슨 성경공부 같은 건가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더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의 움직임에는 어떤 권위가 실려있었다.
"우리는 종교 모임도 집단상담도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책 제목처럼, 우리는 단지 책에서 우리의 길을 찾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 도와야 하죠."
나는 다시 뭔가 물으려 했지만, 리더는 마치 내 의도를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여러분, 모두 나가서 우리의 뜻을 전파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백열등이 흔들리며 그의 그림자가 벽에서 일그러지게 춤추었다.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이상한 빛을 띠었다.
'뭘 전파한다는 거지? 뭘 같이 가자는 거지?'
그의 말이 마치 저주처럼 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모임이 끝나고 좁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아까 그 말씀이 무슨 뜻이에요? 무엇을 전파하고, 어디로 같이 간다는 건가요?"
그녀는 여전히 그 특유의 밝은 목소리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하지만 어딘가 공허하게 들렸다.
"나중에 대답해 줄게요."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달빛 아래서 섬뜩하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지금 무시무시한 뭔가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모두들 2인 1조로 움직이겠습니다."
리더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짝을 지었다.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처럼, 나는 그녀와 한 팀이 되었다. 리더는 각 팀에게 지역을 배정했다. 우리는 홍대입구역 일대를 맡았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건지, 아무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른 팀들은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나만 미로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저녁 7시, 홍대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어둠을 밀어내고,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뒤엉켜 귀를 어지럽혔다. 거리의 사람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물살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으면서도 정작 그 거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화려한 쇼윈도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가끔 누군가가 걸음을 멈추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인파의 흐름이 깨졌다. 한 사람이 멈추면 그 주변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로 가요."
그녀는 마치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엄치듯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놓칠세라 허둥지둥 따라갔다.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그녀가 내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의 입술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내 귓가를 스쳤다.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서리를 쳤다. 마치 곧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까 저도 말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달콤한 독처럼 스며들었다.
"실은 신령님이 저만 알고 있으라고 귀속 말을 해주셨거든요. 저도 신령님과 따로 소통할 수 있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이상하게 반짝였다. 그리고는 마치 사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오늘 너무 행복해요. 상윤 씨와 같이 할 수 있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인파 속으로 돌진하듯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 군중 속에서 춤추듯 흔들렸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운 걸음걸이였다. 그 순간 어젯밤 꿈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두운 극장, 무대 위의 배우들이 갑자기 대사를 잊어버린 것처럼 나는 지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앗아간 것처럼. 그리고 그때, 그녀가 군중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방송국에서 들었던 그 밝고 힘찬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 목소리 속에 광기 어린 열정이 스며있었다. 마치 광장의 설교자처럼, 혹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그녀는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내가 무슨 일에 휘말려 들어온 것인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백열등 아래 그들의 기이한 의식, 푸른 눈의 리더의 수수께끼 같은 미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군중 앞에 선 그녀까지. 이 모든 것이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