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죽음을 확인하는 공식 절차는 생각보다 조용하다. 병원에서 발행된 서류 몇 장과 정해진 양식의 도장, 빳빳한 검은 옷과 하얀 꽃송이, 그리고 한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는 시간. 장례식장 로비에는 낮부터 밤까지 같은 조명이 켜져 있고, 카펫에는 오래된 향 냄새와 국물 냄새와 사람의 발걸음이 겹겹이 밟혀 있다. 나는 지구인들의 장례식에 처음 갔을 때, 이 모든 것이 ‘슬픔을 정리하는 형식’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을 다시 세워 올리는 장치’라고 느꼈다. 떠난 자를 위한 의식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은 자를 위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반복해서 만져 보는 연습. 두 세계가 동시에 같은 방에 앉아 서로를 흘끗거리다가, 어느 지점에서야 겨우 떨어져 나가는 자리.
조문객을 맞이하는 유족석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의 얼굴이 켜켜이 겹쳐진다. 회사 동료, 먼 친척, 오랫동안 소식 없던 친구, 관계의 이름을 잃고 빚처럼 남은 인연들. 그들은 검은 옷의 섬유 냄새를 달고 와서 어두운 방 안에 줄줄이 앉아 차가운 접시 위의 과일을 조금씩 집어 먹다가, 차례가 되면 흰 국화를 들고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내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문장을 듣고 또 말하지만, 명복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모두가 같은 문장을 입에 올린다. 이별 앞에서 각자의 말은 금방 부서지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은 말을 빌려 쓰는 일. 외계인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이 별의 주문이다. 손에 쥔 슬픔을 감당 가능한 크기로 줄이기 위해 꺼내 드는 최소한의 마법.
영정사진 속 얼굴은 늘 조금 더 평온해 보인다. 살아 있을 때보다 정리된 표정, 평소에는 잘 입지 않았을 것 같은 양복, 정성스레 빗겨 올린 머리카락과 주름이 덜 드러나는 각도. 사진 속 사람은 그야말로 “보기 좋게” 남아 있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반대로 흩어져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멍하니 서 있어야 할지 방향을 잃은 눈동자들이 검은 옷의 깃 사이로 불안하게 떨린다. 나는 영정사진과 유족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 별의 삶과 죽음이 이상하게 엇갈려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 있을 때는 언제 죽을지 몰라 허둥대고 죽고 나서야 비로소 단정하고 선택된 모습으로 남는다. 남은 사람들은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고 떠난 사람은 죽음의 끝에서야 삶이 평가된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직 말로 나오지 않은 후회들이 조용히 부풀어 오른다.
장례식장 복도에는 종교가 다른 방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어떤 방에서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천천히 염불을 외우고, 다른 방에서는 목사가 낮게 기도를 올리며 “주님의 품”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또 다른 방에서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만 흐른다. 겹겹이 붙은 문 너머로 각각의 신과 사후 세계가 나름의 방식으로 준비되어 있지만, 문을 여닫는 사람들의 어깨는 묘하게 비슷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천당과 지옥, 극락과 지옥, 환생과 소멸. 지구인들은 저마다 다른 사후 세계를 믿거나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자리에서는 거의 같은 표정을 짓는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어떠한 신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이 문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곳이라는 너무 넓고도 애매한 자리. 이 별의 사람들은 최소한 떠난 사람에게만큼은 ‘지옥’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지옥은 대개 살아 있는 쪽의 입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향해 천천히 씹힌다. 스스로를 향한 판결문처럼.
나는 종종 생각한다. 천당과 지옥은 정말 저 먼 곳 어딘가에 따로 마련된 방일까, 아니면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 안쪽에서 생겨나는 온도의 차이일까. 떠난 이를 떠올릴 때 미소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고 숨이 턱 막히는 죄책감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가 천당에 있는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가 지옥에 있는 것이다. 같은 사람의 죽음이 각자의 기억에 따라 각기 다른 사후 세계로 나뉘어 버린다. 외계인의 언어로 적어 두자면, 이 별의 천당과 지옥은 “죽은 뒤의 장소”라기보다 “살아남은 자의 마음속 기후”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오래전의 잘못을 떠올릴 때 가슴이 갑자기 얼어붙는 사람에게 그 이름은 지옥일 것이고, 같은 얼굴을 떠올릴 때 따뜻한 밥 냄새가 함께 떠오르는 사람에게 그 이름은 천당일 것이다. 한 사람의 생이 끝난 자리에서, 수많은 서로 다른 날씨가 동시에 시작된다.
문상객들은 상주 앞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상주는 그보다 더 깊게 허리를 굽힌다. 서로가 서로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자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고맙습니다.” “힘내세요.” 이 짧은 대화 속에는 묘한 역설이 숨어 있다. 가장 슬퍼야 할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네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대부분 울먹이기만 한다. 나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보면서, 이 행성의 사람들은 결국 말보다 ‘와 주는 것’ 자체로 위로를 주고받는 존재라는 걸 배웠다. 적절한 위로를 끝내 찾지 못할 때 그래도 몸을 데리고 와서 곁에 앉아 있기. 전화 대신 얼굴을 보여 주기. 손을 잡자고 말하는 대신 그냥 손등을 한 번 쓰다듬고 돌아서기. 죽음 앞에서 문장은 쉽게 흐트러지지만, 체온은 비교적 정확한 문법을 가지고 있다. 떨리는 손과 손이 닿는 순간, 누구도 옳은 말을 찾지 못해도 최소한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전달된다.
조문을 마치고 나와 식당으로 들어가면 공기에는 또 다른 온도가 깔려 있다. 긴 상 위에 국과 반찬과 기름기 도는 고기가 올라와 있고, 사람들은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며 젓가락을 든다. 방금 전까지 눈을 훔치던 손으로 뜨거운 국을 떠먹고, 울컥하는 목구멍을 밥알로 천천히 다독인다. 누군가는 고인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누군가는 엉뚱한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애쓰고, 누군가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본다. 웃음과 눈물이 같은 입에서 번갈아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이상하게도 이 별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느낀다. 죽음이 머무는 방 옆에서 밥을 먹고, 장례식장 한가운데에서 대출과 이자 이야기를 하고, 고인의 추억을 나누다가도 곧 내일 출근 걱정으로 대화가 옮겨간다. 삶과 죽음이 깔끔하게 나뉘지 못한 채, 얇은 합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호흡을 섞어 들이마시는 풍경. 이렇게까지 불완전한 방식으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다음 날을 맞는다.
나에게 가장 오래 남은 장례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지 못한 장례식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끝내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이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돈이 없어서, 일이 바빠서, 거리와 시간이 부담스러워서.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말은 껍질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 전화를 받지 않았던 그날, 방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며칠이 내 삶에서 가장 길고도 비어 있는 장례식이 되었다. 아무 형식도, 아무 예식도 없이 나 혼자 얇은 이불 아래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상상만 했다. 누군가의 마지막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형벌처럼 남았다.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나 스스로에게 작은 지옥을 만들어 넣은 셈이었다. “살아 있을 때 잘할 걸”이라는 문장을 누구에게 들은 것도 아닌데, 그때부터 내 안에서 끝없이 되감아 재생했다.
그 뒤로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갈 때면 나는 조금 더 조용해졌다. 고인의 얼굴을 몰라도 영정사진 앞에서 잠깐 눈을 감는다.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를 잠시나마 인정하는 듯한 짧은 침묵.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오래 본다. 상주석 의자 끝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은 몸, 어깨가 자꾸 앞으로 무너져 내려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고 버티는 손가락, 눈을 들어야 할지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표정.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의 표정을 보는 일이, 이 별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떠난 자는 더 이상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고 표정은 모두 남은 자의 몫이다. 그 표정을 지켜보는 일, 그 어깨를 마음속에 기억해 두는 일, 어쩌면 그게 이 행성에서 가능한 가장 작은 애도법인지도 모른다. 내가 할머니에게 끝내 건네지 못한 인사를, 남의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연습하는 것처럼.
가끔은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언젠가 이 별을 떠나는 날, 나를 위한 장례식이 열리지 않는다면 어떨까. 영정사진도, 국화도, 조문객도 없이, 내가 남겨 놓은 글과 미니어처와 낡은 물건들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천천히 정리되는 것. 그때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경계는 어디에서 나뉠까. 외계인인 나에게는 어쩌면 공식적인 장례보다 이렇게 매일 쓰고 있는 일기들이 더 가까운 예식인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끝날 때 그날의 작은 죽음들을 기록해 두는 일. 이미 지나가 버린 장면들을 문장 안에서 다시 불러내고, 쓸 수 있을 만큼만 삶을 조심스레 정리하는 시간. 이 반복이 언젠가 마지막 기록을 적어야 하는 순간에, 내 손이 조금 덜 떨리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내가 살아왔던 날들의 목록을 너무 서둘러 넘기지 않게 해 줄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을 꺼낸다. “살아 있을 때 잘할 걸.” “그래도 이제 고생 끝나셨겠지.” “우리도 건강 챙기자.” 죽음은 언제나 삶 쪽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를 남긴다. 떠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결심으로 옮겨 붙는다. 나는 그 장면이 좋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인간의 다짐은 대개 너무 늦게 도착해서, 다시 흩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짐이 전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 없다면 아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마음들이, 그날만큼은 확실히 이 행성 위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히 하늘에 떠올랐다가 서서히 내려앉는 마음들. 그 궤적 자체가 이 별의 애도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오늘 일기의 끝에 나는 이렇게 적어 두려 한다.
지구인들의 장례식은 죽은 자를 하늘로 보내는 의식이면서, 남은 자를 다시 땅으로 내려놓는 절차였다. 천당과 지옥은 저 멀리 따로 마련된 방이기보다 떠난 이를 떠올릴 때 가슴 안에서 일어나는 기후 변화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떠난 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남은 자는 여전히 매일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삶은 그래서 언제나 무겁고, 죽음은 그래서 언제나 갑작스럽다.
외계인인 나는 오늘도 검은 옷을 입고 조용히 자리를 지켜 본다. 향 냄새와 국물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떠난 사람 대신 남은 사람들의 어깨를 바라본다. 언젠가 이 별을 떠날 때,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속 천당과 지옥을 잠깐 지나가겠지. 그곳이 너무 춥지 않기를, 너무 뜨겁지 않기를, 어느 쪽에도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를, 지금 여기에서 조심스럽게 빌어 본다.
오늘 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쪽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진하게 느끼며, 천천히 불을 끌 생각이다. 그리고 이 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로서 또 한 페이지의 작은 장례식을 일기장 안에 조용히 열어 둘 것이다. 그 페이지를 덮는 손끝이, 내일의 나를 아주 조금 덜 외롭게 만들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