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은하철도 999를 본 건 아주 어릴 때였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화면 속 기차의 머리 위로 별들이 스쳐 지나가던 그 장면만은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우주를 달린다는 설정이 이해되지 않았던 나이였는데도 묘하게 설득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별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지면 철도마저 하늘로 떠올라 버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이상한 납득 같은 것.
그때 나는 아직 내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 말고 다른 데가 있을 것 같다”는 감각 정도만 어렴풋이 품고 있었다. 어른들은 매일 아침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시간에 출근했고 저녁에는 비슷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에서는 늘 비슷한 뉴스가 흘렀고 학교는 언제나 똑같은 종소리로 하루를 열었다 닫았다. 그 단조로움 안에서 우주를 달리는 기차는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탈선처럼 보였다. 선로를 따라가긴 하지만, 그 선로가 이 별의 지도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은하철도 999를 보고 나면 늘 비슷한 상상을 했다. 언젠가 나도 저 기차에 탈 수 있을까. 창밖으로 검은 우주가 펼쳐지고, 별빛이 아무렇지 않게 기차 유리창을 스쳐 지나가는 자리. 지구라는 이름의 정거장이 점점 멀어지고 행성들의 불빛이 역 목록처럼 표시되는 전광판. 나는 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 기차는 어디서 예매를 해야 하는 걸까. 우주역에는 매표소가 있을까. 표를 사려면 무엇을 내야 하는 걸까. 아이답지 않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돈이었다.
“저기까지 가는 표는 얼마나 비쌀까.”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질문이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절실했다. 늘 쪼들리는 집안 형편을 눈치로 알고 있던 아이에게 꿈조차도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끄고 나면 방 안에는 늘 비슷한 침묵이 남았고 그 침묵의 한 모서리에는 “그런 건 만화 속 이야기야”라는 어른들의 표정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른들이 현실을 말할 때 나는 느닷없이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냄새로 맡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 별에서 어느 정도 자라 버린 외계인이 되었다. 은하철도 999는 추억 속 그림으로 남았고 현실에서 내가 매일 타는 것은 우주열차 대신 만원 지하철이 되었다. 그럼에도 가끔, 퇴근길에 지하철 창 밖으로 달리는 어두운 터널을 보고 있으면 아주 잠깐 예전 기차의 잔상이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면 특히 그렇다. 이게 정말 지구인 얼굴이 맞나 싶은 마음과 언젠가 저 창 너머로 별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기대가 동시에 올라온다.
대한민국이라는 행성에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이동 반경이 좁은 일이다. 달력 한 장을 펴 놓고 보면 연차를 낼 수 있는 날은 손가락으로 세는 편이 빠르고 통장 잔액을 생각해 보면 지방으로 내려가는 KTX 한 번 타는 일도 작지 않은 결심을 요구한다. 나는 가끔 인터넷으로 여행지 사진을 훑어보면서 동시에 교통비와 숙박비와 식비를 머릿속에서 계산한다. 그 숫자들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화면 속 바다와 산은 점점 멀어지고 예매 버튼 위로 얇은 유리판 같은 주저함이 내려앉는다.
그럴 때 나는 이상하게도 옛날 은하철도를 떠올린다. 우주까지 데려다 주는 열차는 단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데 현실의 고속열차 예매창 앞에서 오히려 999의 잔상이 선명해지는 건 좀 우습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강원도까지 몇 시간을 버티고 가는 체력이 없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잠시 벗어난 나’를 감당할 용기가 없는 것인지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결국, 내가 매일 붙잡고 있던 일상의 균형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고 돌아와서 다시 그 균형을 잡아야 하는 부담까지 함께 떠안는 일이다.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은 티켓을 손에 쥐고 기차에 오른다. 그 표를 손에 넣기까지 어떤 거래를 했는지 어떤 조건을 받아들였는지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기차에 오르는 것은 늘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그때의 나는 그런 걸 잘 몰랐다. 그냥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웠다. 지금의 나는 안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떠나지 않고 버틴 사람들보다 꼭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철도회사에 항의하고 싶다. 왜 나는 저 열차의 정차역에 포함되지 않았느냐고.
어쩌면 그래서, 나는 꿈에서라도 자꾸 우주선을 탄다. 어떤 꿈에서는 은하철도 999의 객실에 앉아 있고 어떤 꿈에서는 그것이 기차가 아니라 버스나 오래된 통근열차로 바뀌기도 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창 밖에 반드시 지구의 풍경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이름 모를 행성의 황량한 대지일 때도 있고 뜨겁게 빛나는 성운일 때도 있고,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어둠일 때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한 가지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 방향이면, 이 행성보다는 조금 멀어지고 있겠지.”
그러다 새벽 알람이 울리면 꿈의 기차는 늘 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나는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찍힌 신분증을 확인하고 버스 카드 잔액을 확인하고 회사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다. 지도 앱에 찍혀 있는 건 우주역이 아니라 지하철역, 티켓 대신 교통 카드, 출발 시간 대신 출근 시간.
그럼에도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방 소도시로 떠나는 1박 2일 여행이 곧 은하철도일 수 있다. 이곳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처음 타 보는 KTX가 우주선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가끔 용기를 내어 집에서 두세 정거장 더 멀리 내려 보는 일은, 그 정도의 작은 은하 여행쯤 된다.
나는 가끔 휴일에 평소에 내려본 적 없는 정류장에서 내린다. 여행지라고 부를 만한 곳은 아니고 그냥 누군가의 평범한 동네. 이름도 모르던 베이커리가 있고 오래된 세탁소 간판이 퇴색한 채 걸려 있고 사람들은 장을 보고 돌아가는 손에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지나간다. 그런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생각한다.
아, 이게 나에게 허락된 은하철도 999의 축소판이구나.
나는 그 골목에서 티켓 검사를 받지 않는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가만히 걷고, 가끔 멈춰 서고, 이 동네 사람들의 하루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에게 여행은 이제, 다른 행성으로 도망치는 일이라기보다 이 별의 다른 구석을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작은 변주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은하철도 999의 객실을 꿈꾼다. 창가 자리에 앉아 모르는 별들의 이름을 하나씩 중얼거리고 이 열차가 어느 역에서 나를 내려주든 나는 그 행성의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마셔 볼 거라고 다짐한다. 현실에서는 고작 며칠 연휴를 두고도 망설이는 몸이면서, 꿈속에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여행자가 된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우주선을 탈 수 없을 것이다. 여권에 찍히는 도장은 전부 같은 행성 이름일 것이고, 통장 잔고는 늘 계획보다 빠르게 줄어들 것이고, 지방으로 떠나는 건 여전히 작은 결심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여전히 은하철도 999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라는 것.
오늘 밤도 나는 유튜브 어딘가에서 오래된 오프닝 곡을 찾아 틀어 놓고 가사 한 줄을 흥얼거리다가 현실의 기차 시간표를 한 번 훑어보고 결국 어디에도 예약하지 못한 채 불을 끌 것이다. 그리고 일기장에 이렇게 적을 것이다.
오늘은 은하철도 대신 동네 버스를 탔다.
그래도 잠깐, 이 별 너머를 떠올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외계인인 나는 아직 지구행 열차 안에 있고,
은하철도 999는 여전히 내 꿈의 종착역 목록 어딘가에 남아 있다.
언젠가 정말 그 역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 노선도를 마음속에서 한 번 펼쳐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