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의 눈 오는 날

by 쪼교


이 별에서 눈이 오는 날은, 공기가 마치 오래된 서랍을 천천히 여는 사람처럼 굴다.

평소에는 먼지와 배기가스와 편의점 문이 열릴 때마다 새어 나오는 따뜻한 공기가 서로 부딪히며 복잡한 냄새를 만들지만,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공기는 말을 줄이고 대신 빛과 온도로만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마치 “오늘은 조금 다른 기억을 꺼내 보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대에서 느껴지는 빛부터가 달랐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밝은 ‘빛’이 아니라 희끄무레한 ‘기운’ 같았다. 알람을 끄고 커튼을 젖히자 골목 위로 흰 입자들이 사선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밤새 쌓인 눈이 차 지붕과 난간과 간판 위를 덮고 있었고, 출근하는 사람들은 우산 대신 모자를 깊게 눌러쓰거나 목도리를 얼굴까지 올린 채 걷고 있었다.


눈 오는 날의 출근길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자동차 바퀴가 젖은 도로를 지나는 소리도, 발끝에서 뽀드득 나는 소리도, 마치 이불 안에서 나는 것처럼 작게 들렸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호흡 안으로 숨어서 입김을 안에서만 굴렸다.


창문에 기대 그 풍경을 한참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흰 풍경 속에 섞이면 나 하나쯤은 조금만 눈이 더 쌓여도 금방 지워지겠다.

그런데 또, 이렇게까지 쉽게 지워지는 건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외계인에게 이런 모순은 낯설지 않다.

너무 튀거나, 너무 잘 섞이거나. 그 사이 어딘가 경계선 위에 매달린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건 이 별에서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현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층마다 다른 공기를 느낀다. 위층에는 베란다 화분 흙 냄새와 희미한 섬유유연제 향이 섞여 있고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젖은 매트와 오래된 난방기, 현관 앞에서 털어낸 눈이 녹아 만들어낸 물 냄새가 조금씩 진해진다. 같은 눈이지만 건물의 높이에 따라 다른 계절처럼 느껴진다. 이 행성은 그런 식으로 층별 기후를 갖고 있다.


정류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 우산을 뒤로 조금 더 펼쳐 뒤에 선 사람을 반쯤 가려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쓴 채 자기 몸만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패딩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바스락거림, 목도리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얼굴들, 그 사이로 하얀 입김이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곧 사라졌다.


나는 눈 쌓인 인도를 밟으며 줄 끝에 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데도, 내가 아닌 사람으로 서 있는 것 같다.

섞여 있지만,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 느낌.


회사 로비 바닥에는 이미 반쯤 녹은 눈과 발자국들이 뒤섞여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우산꽂이엔 젖은 우산들이 접힌 채 어깨를 기댄 것처럼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눈 많이 오네요”라고 말하고 지나쳤다.


그 말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저 “오늘 춥네요” 대신, “오늘 피곤하네요” 대신, “살기 힘드네요” 대신 꺼내는 안전한 문장. 지구인들은 날씨를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하다.


신발을 벗으며 양말 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서늘함이, 오늘 나의 감정과 가장 비슷한 온도처럼 느껴졌다.

이 별에서는 발끝이 먼저 마음을 말하는 날들이 있다.


점심시간, 나는 일부러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계는 거의 흑백 영화였다. 회색 건물과 희끗한 나무, 그 사이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사람들. 그 틈을 가르며 우산도 없이 편의점 봉투를 들고 뛰어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머리카락 위로 눈이 포슬포슬 떨어졌다가 금세 녹았다.


그 모습을 보다가, 불쑥 한 장면이 돌아왔다.

어느 겨울, 첫눈이 오던 날.

할머니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떴지만,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다시 걸겠지’ 하고 넘기며, 이어폰을 끼고 눈 내리는 창밖만 멍하니 바라봤다. 며칠 뒤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의 진동과 화면 속 이름이 같이 떠올랐다.


그 겨울 이후로 눈이 오면, 나는 눈보다 먼저 그 진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구의 하늘 어딘가에는, 그렇게 미처 닿지 못한 말들이 눈송이처럼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받지 못한 안부, 늦어버린 사과, “다음에 갈게요”라는 약속들. 외계인의 상상 속에서 이 별의 눈은, 그런 것들을 살짝 덮어두는 얇은 흰 커튼 같다.


오후 내내 창밖은 계속 희었다. 그늘진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잠깐씩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때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조명 리허설 좀 길어질 것 같아. 길 얼면 천천히 와.”


짧은 한 줄이었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뭔가가 가슴 안쪽에 살짝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

외계인의 눈으로 보면, 지구의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보고 싶어”보다 “조심히 와”에 더 많은 마음을 숨긴다.

날씨를 빌려 걱정을 건네고, 도로 상태를 빌려 애정을 말한다.


나는 ‘응’이라는 대답 대신, 카톡 창을 한 번 닫고 다시 열어 보기만 했다.

오늘 이 행성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아주 작게지만 또 하나 늘어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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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눈은 아침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건물 밖을 나서며 우산을 펴자, 가로등 불빛 사이를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나는 일부러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과, 이 낯설게 예쁜 풍경 속에 조금 더 서 있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미끄러운 인도를 조심조심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이 별을 떠나게 된다면, 아마 오늘 같은 날을 기억하겠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 한 귀퉁이가 조금 달라지는 날.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나를 덮었다.

기름에 볶다가 불을 줄인 양파 냄새, 끓어오르는 국물 냄새, 세제와 보송한 수건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촛불 향.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전혀 다른 우주의 공기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앞치마를 두른 채 국을 저으며 고개를 들었다.

“밖 많이 미끄럽지?”

눈이 많이 오네, 춥겠네, 고생했네. 그런 말들이 모두 그 한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응, 좀… 그래도 예뻐.”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우산을 현관 한쪽에 세워 두었다. 조금 후면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현관 바닥에 작은 점들을 찍어 둘 것이다. 오늘 내가 지나온 길들이 아니라, 오늘 내가 견딘 감정의 점들처럼.


저녁을 먹고 우리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 눈을 바라봤다.

아내는 대본을 넘기다가 손을 멈추고 말했다.


“나는 눈 오는 날이 좋아. 세상이 잠깐 조용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横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외계인인 나에게 눈은 언제나 ‘다른 행성에서 온 빛’에 가깝다.

풍경을 낯설게 만들고, 구조를 바꾸고, 소리를 줄이는 빛.


하지만 그녀에게 눈은 ‘세상을 잠깐 멈추는 버튼’이었다.

너무 빨리 돌아가던 것들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숨 쉴 틈을 만들어 주는 것.


같은 창문을 통해, 서로 다른 눈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차이가 나를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 별이 하나의 언어로만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경계에 서 있는 나 같은 존재에게도 자리를 조금 내어 주는 것 같아서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현관에 나가 우산을 보았다.

손잡이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물방울이 바닥에 작은 원을 만들고 있었다. 곧 마르겠지만, 오늘의 냄새와 온도와 말하지 못한 감정이 눌려 찍힌 도장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늘 일기의 마지막 줄은 이렇게 적는다.


나는 오늘, 지구인의 눈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눈은 이 별을 잠시 낯설게 만들지만, 그 낯섦 속에서 사람들의 속도가 느려지고 서로의 어깨와 숨이 살짝 겹치는 순간이 찾아온다. 외계인인 나도 그 사이에 조용히 몸을 끼워 넣어, 이 겨울의 밤을 통과해 본다.


언젠가 이 별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분명 맑은 하늘보다 이런 눈 오는 날을 더 많이 떠올릴 것이다. 발끝의 서늘함, 흰 숨, “천천히 와”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 기억들이 이 행성에서의 나를 끝까지 증명해 줄 것 같아서.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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