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과의 전투

by 쪼교


지하철은 이상한 곳이다. 지구인들은 여길 “이동”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종종 “감정의 수송”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피곤이 누군가의 팔꿈치가 되고, 누군가의 짜증이 누군가의 하루를 긁는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각자 견디고 있던 표정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다. 그 표정들은 제 몸의 온도를 잃지 못한 채, 공기 속에 남아 다른 사람의 피부를 잠깐씩 건드린다.


나는 초능력이 없다.

이 별에서는 그게 꽤 치명적이다.


내가 가진 건, 장바구니 속의 계란과 두부, 할인 스티커가 붙은 우유, 그리고 남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몸을 접는 기술뿐이다.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기술. 아마도 이게 내 초능력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커지는 법’이 아니라 ‘작아지는 법’을 먼저 배운다. 커지면 부딪히니까. 부딪히면 다치니까.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내 존재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하루를 통과해왔다.


그날도 그랬다.


러시아워의 공기는 사람 수만큼 눅눅했고, 바닥은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로 미끄러웠다. 나는 문 옆에 섰다. 나 같은 존재는 늘 문 옆에 선다. 내릴 때 빠르게 도망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의 어깨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다음 역의 문틈을 먼저 본다. 지하철에서 내 마음은 늘 ‘현재’가 아니라 ‘탈출’에 살고 있다.


그리고 빌런이 탔다.


지구의 빌런은 괴물처럼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 무섭다. 특별한 악의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매일의 피로와 분노에 훈련된 사람. 그가 가진 것은 권력이 아니라 무감각이다. 무감각은 어떤 폭력보다 흔하고, 흔한 만큼 들키지 않는다.


그는 아주 큰 소리로 통화했고, 아주 큰 몸짓으로 통화했고, 그 몸짓의 궤적은 이상하리만큼 정확하게 내 어깨를 향해 있었다.


“아니 형, 내가 말했잖아! 그게 아니라니까!”


그의 목소리는 객차 전체를 휘감았다. 말은 공기보다 진해서, 누군가가 크게 말하면 그 말이 내 호흡을 눌렀다. 나는 숨을 줄였다. 이 별에서 나는 자주 숨을 줄인다. 숨을 줄이면 존재도 줄어드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숨은 내 마지막 은폐 장치다.


팔꿈치가 툭—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처음엔 참았다.

두 번째도 참았다.

세 번째부터는 속으로 계산이 시작됐다.


지금 말하면 괜히 큰 일이 될 확률 70%.

상대가 화낼 확률 55%.

내가 말꼬일 확률 92%.

그리고 집에 가서 샤워하면서 이 장면을 17번 재생할 확률 100%.


이 별에서의 전투는, 싸우기 전에 이미 패배를 예습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늘 예습을 잘한다. 그건 내가 지구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는 뜻이고, 동시에 내가 지구에서 오래 상처받았다는 뜻이다. 나는 승리하는 법보다, 상처를 덜 입는 법을 먼저 배웠다.


팔꿈치가 또 툭—


이번엔 비닐봉지 속 계란들이 서로 부딪혔다. 아주 작은 딱 소리.

그 소리가 내 마음에 먼저 금을 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절망은 대개 이런 소리로 온다. 딱. 뭔가 깨질 것 같은 소리. 실제로 깨지지 않아도, 사람은 그 소리만으로도 불안해진다. 깨진 건 계란이 아니라, ‘오늘도 무사하겠지’라는 내 믿음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한데…”


이미 시작부터 패배의 언어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으면, 나는 말문이 트이지 않는다. 지구에서 나는 늘 먼저 사과하는 방식으로 숨을 쉰다.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될까봐 두려운 종족, 그게 나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과를 사용하지만, 사과는 때때로 나를 더 약하게 만든다. 사과는 내 권리를 말하는 대신 내 존재를 설명하려고 든다.


“팔꿈치가…”


문장이 거기서 흔들렸다.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내 안의 우울에 먼저 닿고, 상대에게는 늦게 닿는다. 우울은 내 말의 첫 번째 청자다. 언제나. 내 말이 바깥에 도착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구겨진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엔 자막이 떠 있었다.


‘뭐래?’


나는 그 자막을 읽는 데 능숙하다. 지구에 오고 나서 내 모국어보다 더 많이 배운 건 이 자막들이었다. 사람의 표정으로 뜨는 무자막 자막. 그 안에는 늘 비슷한 단어들이 있다. 예민, 유난, 쓸데없음, 왜 저래. 이 단어들은 언제나, 말한 사람보다 듣는 사람을 먼저 작게 만든다.


“아, 뭐가요?”


그는 통화를 잠깐 멈추고 내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내가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불편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치워야 하는 것. 지나가야 하는 것. 인간은 때때로 타인을 ‘인격’이 아니라 ‘장애물’로 본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나는 내 몸이 갑자기 얇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 안의 비굴함이 몸을 앞으로 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제일 빠른 귀가 방법이다. 내가 평화를 유지하면, 나는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무사히’에 중독되어 있었다. 행복이 아니라 무사히. 별일 없는 하루. 다치지 않은 마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왔다.


그런데 또 툭—


팔꿈치가 내 어깨를 쳤고, 이번엔 우유 뚜껑이 살짝 삐끗했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나는 알았다. 미세한 틈으로도 일상은 새기 시작한다는 걸. 그리고 내 마음은 이미 예전부터, ‘미세한 틈’에 가장 약한 재질이었다는 걸.


나는 갑자기, 용감해졌다.

아니, 사실은 우유가 나 대신 분노해준 거였다.


나는 늘 내 감정보다 장바구니를 더 잘 지킨다. 내 마음이 새는 건 익숙하지만, 우유가 새는 건 당장 냄새가 나니까. 생활의 손실은 눈에 보이고, 마음의 손실은 ‘그냥 내가 예민해서’라고 말해버리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만 용감해진다.


“계속 치세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놀랐다.

내가? 방금?


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잠깐 잊었다. 이 별에서 나는 보통 잊고 산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는지. 나는 늘 생존하는 사람이었지,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빌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요?”


그가 몸을 기울였다. 아주 조금. 그 아주 조금이 내 심장을 크게 만들었다. 심장은 작아지는 법을 모른다. 내가 아무리 나를 접어도, 심장은 늘 본래 크기로 울린다. 그래서 심장은 가끔 나를 배신한다. 내 의지보다 먼저 뛰어버리니까.


주변 사람들은 더 깊이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누군가는 이어폰 볼륨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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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늘 이런 순간에 튀어나온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선명하게. 수백 명이 같은 칸에 서 있는데도,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는 느낌. 내가 말하면 공기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공기는 그저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나는 그 무거움 속에서 혼자 떠오르려 한다. 혼자 떠오르는 일은 언제나 더 힘들다.


나는 결국,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


“팔꿈치가 제 어깨에 계속 부딪혀요. 통화는 괜찮은데… 팔은… 좀…”


또 “좀”이 붙었다.

나는 끝까지 강해질 수 없었다.

문장도 마지막에 주저앉았다.


나는 왜 마지막에 늘 ‘좀’을 붙일까. 내 요구를 한 발 뒤로 물리기 위해서일까. 내가 ‘권리’가 아니라 ‘부탁’으로 살기 위해서일까. “좀”은 나의 안전장치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늘 덜 사람으로 만드는 단어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마지못해 팔을 안쪽으로 붙였다.


“아, 알았어요.”


끝인가 싶었는데, 지구는 늘 추가 과금이 있다.

그는 통화를 다시 시작했고, 일부러 더 크게 말했다.


“아니, 옆에 예민한 사람이 있어가지고…”


그 말이 내 귀를 때렸다.

“예민한 사람.”


상대를 작게 만드는 주문. 이 별에서 그 주문은 너무 흔해서, 사람들은 그게 폭력이라는 걸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폭력은 늘 이렇게 작고 일상적인 얼굴로 지나간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몸에 멍이 남지 않는 대신, 말이 오래 남는다.


나는 순간 웃음이 날 뻔했다.

내가 예민하다고?


나는 둔감해지려고 이 별에서 매일 훈련했는데. 수치를 무뎌지게 만들고, 표정을 숨기고, 생각을 단단히 접어 넣는 훈련. 그런데도 이 별은 내게 “예민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참은 사람’을 예민하다고 부른다. 참다가 한 번 말한 사람을, 그 한 번으로 정의해버린다.


하지만 웃음은 목구멍에서 멈췄다.

웃으면 내가 약해 보일까봐.

울면 더 약해 보일까봐.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 안에만 조용히 구멍을 하나 더 냈다. 구멍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멍을 모른다. 모르는 동안 구멍은 커진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갔다.


말로 때리지 않고,

존재로 버티기.


나는 더 이상 몸을 피하지 않았다.

어깨를 빌려주지 않았다.

내 눈을 화면 뒤에 숨기지 않았다.

그냥 똑바로 서서 내 공간을 유지했다.


사실 그건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종종…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전투다.


무너질 수 있는 순간에 무너지지 않는 것.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붙잡고, 계속 서 있는 것.

지구에서 ‘서 있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지구는 늘 사람을 앉히거나 눕힌다. 눈치를 앉히고, 마음을 눕히고, 자존감을 구석에 웅크리게 한다. 그 사이에서 똑바로 서는 것은 작고 조용한 혁명이다.


다음 역,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빌런도 내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내 쪽을 흘끗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 흘끗은 사과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었다. 그저 “불편했네” 정도의 표정이었다. 지구에서 많은 폭력은 사과를 몰라서가 아니라, 사과할 만큼의 마음을 쓰지 않아서 생긴다.


전투가 끝났다.


나는 이겼을까?


지하철에서는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다만 오늘 나는 “0:10”으로 지던 경기를 “4:10”쯤으로 바꿨을 뿐이다. 완패 대신 부분패. 침묵 대신 문장 하나. 도망 대신 발바닥에 힘 한 번.


나는 비닐봉지를 내려다봤다.

계란은 아직 무사했고, 우유도 새지 않았다.

라면은 원래부터 전투 준비가 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에서의 전투는 악당을 쓰러뜨리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우지 않게 붙잡는 일이라는 것.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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