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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Oct 24. 2023

그들만의 이야기

짧은 글


 전화를 받고나는 영주의 아파트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도착해서도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가 없어 5층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문을 열자 화장품 냄새가 풍겼고뭔지 모를 비릿한 냄새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집안은 온통 어두웠다열린 채로 방치된 창을 통해 들이친 빗방울에 베란다의 화분들이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온기가 빠져나간 집은 습하고 찬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불안한 것은 추위가 아니라 그녀의 상태였다.   


 지선아?”   

  

 거실에 불을 켰다지선은 거실에 없었다대답도 들리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안방 문은 닫혀있었다문을 열어보았지만 지선이는 보이지 않았다도로 문을 닫고 돌아서려는 순간화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나는 화장실로 다가갔다거울 속에 검은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화장실 문을 여니 지선이가 보였다그녀는 발가락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화장실 스위치를 켜고 화장실 안을 자세히 보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화장실 바닥이 온통 검붉은 피로 덮여있었다나는 곧바로 수건을 꺼내와 지선이의 발을 덮었다그러는 동안에도 지선이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지선이는 동아리 친구 영주의 여자친구였다영주는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다키가 큰 것도잘생긴 것도 아니고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영주는 사슴을 닮은크고 슬픈 눈을 가졌다긴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렸으며호리호리한 체격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피웠다.  그 주위엔 항상 여자가 따라다녔다그리고 영주는  여자를 바꿔가며 연애를 했다.  영주는 여자를 울리는 데 재능이 있었다영주와 처음 만나는 여자는 항상 눈물을 흘렸고눈물 흘린 여자는 영주를 보살피려 했고감싸 안으려 했고매달리려 했으며 끝도 없이 영주에게 빠져들었다


 영주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여자를 처음 만나면 영주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낸다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열이면 열 영주에게 넘어오게 된다남자라 해도 마찬가지다마법 같은 영주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빨아들이고야 만다  

   

 영주의 어머니는 영주가 중학생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웅크린 영주는 매일 같이 엄마를 그리워했다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너무나도 두렵고 슬픈 세상이었다

 영주 아버지는 영주가 고등학생 때딸이 하나 있는 여자와 재혼하셨다새어머니는 영주를 싫어했고아버지는 영주에게 무관심이었으며 이복여동생에게만 사랑을 주었다영주는 외로워서너무 쓸쓸해서너무 고독해서너무 우울해서 죽고 싶다고 했다


 영주의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보호본능이 생겼고인류애가 생겼고슬퍼졌고같이 울어줬고영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도 영주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부끄러웠다영주에 비하면 부모에게 맞고 자란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뭔가 미안했다그래서 영주가 나를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같이 있어주었다같이 밥을 먹었고같이 술을 마셨고같이 놀고같이 공부를 했으며 매번 바뀌는 영주의 여자친구를 소개받았다그것이 불쌍한 영주를 위해 친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나는 영주가 행복했으면 했다.     

  

 그런 영주가 한 여자에게 푹 빠진 일이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지선이었다지선이는  대학로의 이름 없는 작은 극단의 연극배우였는데 내가 에쿠우스라는 연극에 단역으로 잠시 공연했을 때 여주인공이었다한 번은 영주가  공연을 보러 왔다가 지선이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공연이 끝난 후영주는 뒤풀이에 참석하였고지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지선은 듣기만 하는 여자는 아니었다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여자였다공연 연습을 하는 중에도 누군가를 처음 보면 언제나 지선이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영주에게도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각자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 둘은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서로에게 끌리는 기분이었다고 했다그 힘은 영주에게 더 크게 작용했다언제나처럼 지선이 영주에게 빠진 것이 아니라영주가 지선에게 빠지고 말았다처음으로 영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빠져든 것이다.


 나는 영주와 지선이가 행복하기를 바랐고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영원했으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나도 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영주는 지선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더 이상 여자를 만나지 않았으며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영주는 지선이를 자기 아파트에 살게 해 주었고학교도 휴학했다그리고 지선이를 돌보기 위해 택배일을 하기 시작했다그렇게 영주는 지선이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그는 그들만의 새로운 이야기로 이전의 어두운 이야기를 지우려 했다그가 아는 지선의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스무 살 때지선은 부모님과 남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홀로 남게 되었다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죽지 못해 살아왔다고 한다그러다가 우연히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을 연기한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다무한한 해방감을 느꼈다.  

 지선은 그렇게 배우가 되었다단원들과 함께하는 삶에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겨났다하지만 그녀는 이유 없이 아팠다고 한다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끼며 쓰러지곤 했다자신의 존재가 서서히 엷어지고 가벼워져결국은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도 말라가고 있었다병원에 갔을 때그녀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그날 이후 지선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지선이의 이야기에 영주는 눈물을 흘렸다처음으로 타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그때 영주는 지선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라 다짐했다학교도만나는 여자들도 포기하고 지선이만을 위해서 살기로 했다지선이와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거라 마음먹었다.      

 나는 이 불쌍한 청춘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건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것은 아니었다내 삶도 힘들고 충분히 괴로웠다그런 내가 누군가의 행복을 순수한 마음으로 빌어준다면나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지선이의 핸드폰이 울렸다나는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규호니그래 지선이는 어때?”

 발가락이 조금 찢어졌는데 심각한 건 아닌 거 같아내가 병원에 데리고 갈게.”

 영주는 울먹이며 말했다.

 고마워내가 일 끝내는 대로 병원으로 갈게.”

 

 나는 전화를 끊고 영주에게 말했다.

 가자병원에 데려다줄게.”

 그러자 지선이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 오빠는 안 와요이젠 제가 필요 없대요?”

 그런 거 아냐일하느라 못 왔대.”

 지선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부축을 받았다나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영주가 나타났다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었던 듯아직 작업복 차림이었다. 영주를 보자 지선이 말했다.


 이래서 내가 싫다고 했잖아요이제 가망이 없으니까 떠난다고 했잖아요그래도 안 떠난다고 해서 그렇게 믿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그런데  내가 필요할 때 왜 옆에 없는 건데요?”


 지선은눈으로는 나를 보면서 말로는 영주를 원망하고 있었다그 말에 영주아 뭐라고 대꾸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은 영주를 처치실로 데려갔다복도에 남겨진 나와 영주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그렇게 잠시 서성대다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처치실로 들어간 환자 말인데요백혈병 환자입니다.”


 내 말을 들은 간호사는 담당 의사에게 달려갔다응급실은 어수선해졌고영주와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응급처치를 받고 지선이가 다시 나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의사에게 네가 백혈병이라는 것을 알렸으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더 기다려보자고


 혹시나 해서 추가 검사를 해보자고 했어너 백혈병이잖아.”


 그 순간 지선이의 표정은 바뀌었다아픈 사람의 얼굴이 아닌 무엇인가에 놀란 사람의 얼굴이었다갑자기 지선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복도를 달려 나갔다나와 영주는 따라 나갔지만 지선이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그날 이후 영주와 나는 지선이를 볼 수 없었다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표정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넋이 나가 있었다     


 그날 이후 나와 영주는 지선이를 찾아다녔다지선이가 있던 극단에도 찾아가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아는 게 없었다그 대신극단 동료 배우에게서 지선이의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선이는 서울의 작은 병원장의 딸이라고 했다대학 입학을 거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딸을 위해 지선이의 아버지는 지인인 극단 대표를 통해 딸을 입단시킨 거라고 했다그나마 극단 생활에는 잘 적응하는가 했는데어느 날  어떤 남자를 만났다더니 이내  사라졌다고 했다물론 지선이는 백혈병도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영주는 몇 개월 후에 군에 입대를 했다영주와 지선이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나의 이야기도 그렇게 멈추었다.      

 

 허전한 마음에 나도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를 했다동아리 동기인 상태에게 편지가 왔다영주에 대한 이야기였다영주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다고 했다영주의 부모님은 이혼하신 것도 아닐뿐더러 여동생도 이복동생이 아닌 친동생이라고 했다많은 이들이 영주의 진실을 알고  분노를 했다고 했다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슬퍼해야 하는 것인지웃어야 하는 것인지... 




 영주의 이야기는 영주만의 이야기였고지선이의 이야기는 지선이만의 이야기였던 것이다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뭐였을까어쩌면 그것은 속아 넘어가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닮은 그들은 서로에게 끌렸을지도 모른다꾼은 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만약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해피엔딩이었을까아니면 상처만 남은 새드 앤딩이었을까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아마도 그들의 이야기에 나는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투투 툭 소리가 나더니 어두워진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치기 시작했다비가 온다는 예보도 없었다어차피 날씨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사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창에 비치는 내 모습이 더 초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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