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아버지는 엄마 앞에 배즙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배즙상자 안에는 신문지로 둘둘 싼 돈뭉치가 있었다. 돈을 받으러 간 아버지가 받아온 것은 배즙 한 상자와 단돈 100만 원이었다. 5000만 원이 없어 5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날릴 판이었다. 아버지가 받아와야 할 돈은 7000만 원이었고, 그게 돈뭉치일필요는 없었지만 적어도 배즙일필요는 없었다. 개인채무는 넘기더라도 은행압류건이라도 해지하려면 5000만 원은 필요했다. 당장 해결하지 못하면 건물은 압류될 것이고, 예정되어 있던 내 미국유학은 말 그대로 물 건너갈 판이었다. 엄마는 어두운 얼굴로 방문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배즙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건물의 운명은 저 배즙으로 바뀐 건가, 나의 유학은 이제 꿈으로 끝나는가라고 말이다. 나는 배즙하나를 꺼내 들이마셨다. 씁쓸한 비린내가 났다. 나는 코를 막고 쓰레기통에 배즙을 버렸다. 내가 배즙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동안 아버지는 녹아내려 흉하게 늘어진 플라스틱 마냥 소파에 누운 채로 굳어있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우리 집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넉이 빠진 목소리도 대답했다.
돈을 받으러 박사장 매장에 갔는데 돈을 못 받은 다른 사람들도 이미 매장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배즙상자, 사과즙 상자. 양파즙 상자가 놓여있었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 해서 돈인 줄 알고 배즙상자를 들었는데 그 안에는 배즙과 돈 100만 원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박사장은 보름의 시간을 달라며 우선 100만 원이라도 준비했다고 했다. 딸 대학등록금을 쪼개서 세 사람에게 우선 나눠줬다고 했다. 세 사람은 매장밖으로 나와 담배한대씩 피며 상의했다고 했다. 박사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꼭 돈을 줄 거라며 한 번만 믿어주기로 했다고 했다. 돈을 받기 위해 돈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당시 권리금 2억이 넘는 매장이었기에 권리금을 받으면 모두 해결해 주겠다는 말을 믿었었다고 한다. 박 사장 말을 믿고 그들은 각각 상자 하나씩 골랐고 아버지는 배즙상자와 100만 원을 받아온 것이었다.
의류제조 공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은 동대문에서도 규모로 손에 꼽히는 도매업자인 박사장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동대문에 가장 장사가 잘되던 디자이너클럽 도매상가에 가장 큰 매장을 가지고 있었고, 하루 판매량만 수천만 원을 넘어가고 있었고, 물건이 없어 판매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영업이 끝나고 나면 돈 세는 기계로 돈을 셀정도였다고 한다. 부모님의 공장은 매일 야근에 주말까지 일하면서 열심히 옷을 만들어 보냈다고 했다. 엄마는 영양제를 맞아가며 미싱을 돌렸고, 아버지는 한 덩어리에 30kg이 넘는 물건을 스무 덩어리씩 매일 매장으로 배달을 했다. 그렇게 일 년을 일했으나 매달 결재된 돈은 극히 일부였다고 했다.
예를 들어 그 달에 1000만 원의 돈을 받아야 한다면 결제된 금액은 400만 원만 결제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에 또 1000만 원과 미수금 600만 원을 합한 1600만 원을 받아야 하는데 결제된 금액은 300만 원 정도였다고 했다. 이렇게 쌓인 미수금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부모님은 직원들 월급과 자재값, 은행에 빌린 돈을 갚기 위해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건물을 빼앗길 지경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박사장은 한방에 입금한다며 물건을 안보내면 입금은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박사장은 3개의 공장과 거래를 했고, 미수금은 수억에 달하게 되었다. 한계에 다다르자 박사장은 과일즙과 100만 원으로 채권자를 농락했던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은 평생 노동의 결과물인 건물을 잃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그랬다. 박사장을 20년을 넘게 알고 지냈지만 돈문제는 확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안타깝다고 했다. 엄마는 말했다.
"돈 떼먹으려고 작정한 사람이 뭐가 안타까워"
갑자기 날리는 굉음에 아버지는 정신이 번쩍 든 듯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약속일이 다가와 박사장에게 연락을 했지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고 했다. 바로 매장에 찾아가 보았지만 매장은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영업하고 있었다. 권리금도 모두 치르고 들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돈을 못 받은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그중에 양파즙을 가져간 사람만이 돈을 받았고, 아버지와 사과즙을 가져간 사람은 돈을 못 받았다고 했다. 양파즙을 가져간 사람은 박사장을 믿지 못해 매일 같이 매장에 찾아갔다고 했다. 매장을 빼는 날 돈 달라고 소리소리쳐서 간신히 돈을 받았다고 했다. 박사장은 배즙을 가져간 아버지와 사과즙을 가져간 사람만이 돈을 못 받은 것이다. 달달한 과일을 좋아한 두 사람만이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법원에 고소를 했지만 연락이 두절된 박사장에게 돈 받을 방법은 망막했다. 결국 돈을 받지 못한 아버지는 건물을 은행에 넘기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암흑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우리 집은 서울이 아니라 일산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사는 것을 말이다. 휴가를 나와 집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지역번호를 눌러야 한다는 것이 어색했다. 나는 서울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귀양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운 아버지였지만 아버지가 불쌍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에 박 사장을 찾고 싶었다. 부모님의 건물을 날리고 내 유학의 길을 날려버린 박사장을 찾아 돈을 받아내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내부순환도로 다리기둥에 붙어있던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라고 적혀있는 전단지를 보았다. 무작정 전단지를 떼어내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떼인 돈 확실히 받아주나요?"
"그럼요 사람 찾는 건 기본이고, 돈도 찾아드립니다. 혹 돈을 받지 못하면 수수료는 안 받습니다."
나는 고 팀장이라는 사람을 제기동 한약거리 입구에서 만났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래된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 고 팀장은 어느 카드사에서 법무팀장으로 있었다고 했다. 채권추심 전문이니 믿어보라고 했다. 속는 기분이었지만 아버지에게 받은 박사장의 옛날 주소와 전화번호, 이름, 그리고 언제까지 변제하겠다며 박사장이 써준 각서를 건네주었다.
먼저 착수금으로 50만 원을 건넸다.
"자 이제 박사장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이젠 제 원칙인데 채무자를 찾으면 우선 고객님에게 기회를 드릴 겁니다."
"어떤 기회요?"
" 고객님이 직접 돈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직접요?"
"네 생판 모르는 사림이 나타나 무조건 돈 갚으라고 하면 감정싸움으로 번져 오히려 돈 받기 더 힘들어질 수 도 있습니다. 채권자가 먼저 인간적으로 다가가 채무자가 정말 돈을 줄 의향이 있는지, 돈 갚을 능력이 되는지를 알아보는 거죠"
나는 박사장의 인상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려 물건을 어깨에 메고 매장에 배달 간 적이 있었다. 뒤통수까지 벗겨진 이마에 뿔테안경을 쓴 선한 인상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박 사장은 나에게 아버지 일을 도와주는 것이 기특하다며 박카스를 준 적이 있었다. 아버지보다 한참 나이 들어 보였는데 5살 연하라고 했다. 나는 박사장이 성공한 사업가이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박사장을 보면 박사장 얼굴에 주먹부터 날리고 싶었다. 그런데 설득해서 돈을 받으라니.
"연락 안 된 지 얼마나 되셨나요?"
"한 5년 정도인 거 같습니다"
5년밖에 안 됐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몇십 년이 지난 것처럼 길고 긴 터널 속에서 우리 가족이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죄지은 초등학생처럼 몸을 비비 꼬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박사장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했다. 우연히 동대문 남평화 상가 앞에서 박사장을 만났는데, 박사장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고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박사장은 지게를 지고 건물을 오르내리며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박사장은 돈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박사장에 대한 소문은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돈을 들고 외국으로 도망갔다.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갔다. 지방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팔자 좋게 살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박사장은 외국으로 도망가지도, 감옥에 있지도, 지방에 있지도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동대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박사장은 꼭 갚은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돈은 모두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고 했다. 남은 돈은 딸 유학비용으로 대부분 나가고 조금 남은 금액은 사과즙상자를 가져간 사람에게 갚았다고 했다.
그러면 양파즙과 사과즙을 가져간 사람 돈은 모두 갚은 것이고 아버지만 돈을 못 받은 것이다. 그러니 다음은 배즙을 받은 아버지 차례라고 했다. 나는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아마도 박사장을 우연히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버지는 박사장을 찾지도 않았을 거고 혼자만 돈을 못 받았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서만 냉정하고, 집에서만 큰소리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야!"
지금 엄마가 아픈 것은 아버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다른 사람도 갚았으니 우리 돈도 갚을 거라고. 다시 한번 믿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박사장 연락처와 일하는 장소를 받고 고 팀장에게 전달했다. 얼마 후 고 팀장은 박사장 전화번호는 정지되어 있었고, 남평화 상가에 찾아가 박사장을 찾았지만 이미 그만두고 사라진 뒤였다. 박 사장은 또 사라졌다. 나는 피해자들 중에 가장 적은 금액인 아버지만 돈을 못 받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마도 박 사장은 처음부터 맛이 없는 배즙을 고른 아버지 돈을 갚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외국에서 공부하는 딸 때문이라도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박사장의 말을 믿었던 거 같다. 유학 가고 싶어 하는 아들의 꿈은 잊은 채로 말이다.
얼마 후 고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사는 곳과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동대문에서 오토바이를 몰며 퀵배달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박사장은 동대문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고팀장은 결정하라고 했다. 직접 만나보던가 아니면 본인이 직접 받아내겠다고 했다. 고팀장은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팀장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고소를 해도, 압류를 해도 꼼짝 않던 채무자가 있었는데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고, 집에 찾아가서 벨을 눌렀다고 했다. 결국 돈을 받아내었다고 했다. 돈은 채권자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돈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 난다고 했다. 나는 양파즙을 받은 사람이 생각났다. 나는 박사장을 만나고 싶었다. 박사장을 만나 후련하게 복수하고 싶었고, 그리고 나는 아버지와 다르게 노력해서 돈을 받아내고 싶었다.
나는 고 팀장에게 박사장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화곡동 어느 빌라촌으로 찾아갔다. 주소에 적힌 박사장 집은 다른 집들과 다르게 유독 낡아 보였다. 빌라 입구에는 물건을 많이 싣기 위해 뒷좌석을 긴 파이프로 연장해 놓은 오토바이가 보였다. 나는 오토바이를 보고 확신했다. 박사장이다.
주소에 적힌 B101호를 찾아내서 문 앞에서 멈칫했다. 저 문만 열면 박 사장이 있다. 돈을 받을 수 있다. 마음과 다르게 나는 문 앞에서 망설였다. 아니 두려웠다. 왜였을까. 박사장이 아닐까 봐?, 아니면 돈이 없다고 할까 봐?, 갚을 수없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망설이고 있을 때 내 또래의 여자가 계단을 내려왔고, 박 사장집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박사장이었다. 나에게 인자한 얼굴로 박카스를 건네던, 내 유학의 꿈을 날려버렸던, 아버지를 농락하던 박 사장이었다.
박사장은 나를 보며 말했다.
"누구세요?"
나는 소리 질렀다.
"000 씨 아들입니다! , 돈 받으러 왔습니다!"
박사장과 박사장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었는데,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볼품없이 쪼그라들어있는 노인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없었다. 나는 박사장이 불쌍해 보였다. 나는 역시 아버지 아들인 것인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후로 고팀장에게 몇 번 전화가 왔었지만 나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규호야 돈 들어왔다. 박 사장이 돈 갚았다."
7년 만에 돈을 받았다. 너무나 많은 것을 바꿔버린 시간이었지만 꽉 막힌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연예가 중계'를 보고 있는데 유명 축구 선수가 결혼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지만 금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였다. 박사장 딸.
유명축구선수 옆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는 그녀는 박사장 딸이었다. 그때 돈 갚으라고 소리 질렀을 때 놀라 하얗게 질린 박사장 딸의 얼굴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사장 딸은 몰랐던 거 같았다. 그리고 박사장 딸이 결혼하면서 아버지의 빚을 갚아준 거 같았다. 박사장 딸은 알고 있었을까. 딸을 유학 보내기 위해서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그날 화목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서울에 있는 고급식당에 가서 외식을 했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보며 박사장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박사장은 딸의 미래를 위해 사기를 쳤다. 그리고 끝까지 딸을 지키려들었다. 그럼 음식이 맛있다며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박사장을 믿었을까?
고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 축하합니다. 돈 받으셨죠? 그럼 수수료 입금하셔야죠.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