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동화
내가 있는 곳은 빛도 온기도 없이 냉기만이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나의 선배들은 한때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이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고 했다. 선배들은 스포츠경기에서도, 콘서트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당대 가장 있는 인기 연예인들과 광고를 찍기도 했다. 그리고 고속도로의 대형광고판, 건물 옥탑, 신문등에서도 선배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고 한다. 선배들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선배들을 선취하기 위해 달려들었다고 했다. 나는 선배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선배들의 대를 잇기 위해 이곳에서 1년을 넘게 기다리고 있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영광 뿐이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지만, 나는 영광의 그날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 믿고 있다.
세상에 나가게 되다면 나는 노력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다시 찾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건재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할 것이다.
옆방에는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녀석들이 있다. 대기시간이 없을 정도로 그 방에 들어가면 곧바로 지정된 장소로 불려 나간다. 그 녀석들은 나보다 더 큰 덩치를 가지고 있고,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녀석들의 건방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우리를 향해 모욕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 요즘 세상에 누가 너희들을 찾냐? 이 한물간 노땅들아. 크크크 "
마음 같아서는 녀석들을 찾아가 머리를 따버리고 싶었지만, 우리에겐 품격이라는 것이 있다. 녀석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 때가 되면 녀석들에게 몇 배로 갚아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도 우리를 찾고 있지 않다.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금방 나갈 줄 알았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릴 줄은 몰랐다. 마음 한편에 녀석들이 부럽기도 했다.
이건 우리만의 고민이 아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같이 활동했던 위층 녀석들은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사실 멸종위기에 놓인 것은 우리뿐 아니라 2층과 3층에 있는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는 1층 끝방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안도할 따름이다.
1년 전 내가 이방에 들어왔을 때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선배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내 차례도 금방 올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커피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커피가 바로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문 앞에서 멈춰버렸다. 이제 곧 내 차례인데 코앞에서 6개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내 안의 열정은 조금씩 식어갔다. 그리고 조금씩 우울해져 갔다.
그래도 나를 덜 외롭게 하는 것은 나와 같은 동료들이 같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우리들은 힘을 내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 여름이 왔다. 차라리 에어컨이 돌아가지 않는 겨울이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부딪히며 약간의 온기로 버틸 수 있었다. 여름이 오자 에어컨은 다시 돌아갔고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때쯤 문이 덜컥 열렸고 우리를 담당하던 매니저가 들어왔다. 1년 만이었다.
내가 매니저를 만난 날은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내가 막 태어났을 때 매니저는 나를 들고 흔들어 댔다. 매니저는 나를 향해 자신의 취향이라고 했다. 아무리 유행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매니저는 1년 만에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매니저는 말했다.
"잘 지냈어? "
잘 지내긴, 하도 입을 닫고 있어서 단내가 날 지경이다.
매니저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드디어 여러분들을 찾는 곳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최신 유행의 거리, 젊음의 거리, 예술인의 거리, 대학로로 말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너무 기쁠 때 소리 내지 않고 웃는 것처럼 모두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지쳐 반응할 기운조차 없어서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선택받은 이는 제일 앞줄에 있는 우리들뿐이었다. 뒤에 있는 친구들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고난의 시간 속으로 또다시 들어가야 한다. 실망한 친구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춥고 어두운 곳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남겨둔 친구들을 보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나온 우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세상은 따뜻했고, 시끄러웠다.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음악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고양이가 우는 소리, 서로가 부딪히며 나는 마찰음 소리로 현기증이 났다.
매니저는 작고 낡은 트럭 짐칸 위에 우리를 대충 던져 넣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과거 선배들은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차를 타고 이동했다고 했다. 고급스럽고 안락한 무진동 차였다고 했다. 또 신호대기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선배들을 향해 소리치고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다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얼굴이 그려진 차를 타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고, 우리를 존중하게 만들거라 말이다.
모두들 세상에 나간다는 설례임에 들떠있을 때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니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다. 매니저 없이 간다는 건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예민해졌을지도 모른다. 그 방에 있을 때는 밖을 나간다는 것이 무척 중요한 요소였는데 어느새 나는 그 핵심요소를 잊고 자잘한 것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우리들의 미래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친구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갈 때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지, 모자를 삐뚤게 쓰고 있는지, 더러운 때가 묻어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친구들을 하나씩 새로운 세상으로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내가 나갈 것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차는 대학로 어느 골목길에 멈추었다. 내가 듣던 대학로와는 사뭇 달랐다. 인적이 드물었고 주변에 있어야 할 극장이라던지, 식당,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찾을 거 같지 않은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작고 오래된 술집만이 보였다. 우리는 전성기가 한참이나 지났을 법한 낡은 자판기 앞에 놓여졌다.
나는 실망했다. 적어도 여긴 아니었다. 1년을 넘는 시간 동안 차가운 공기 속에 한 줌의 빛도 없는 좁은 방에서 꿈꿔왔던 곳은 이런 곳이 아니었다. 찬란한 빛이 비치는, 우리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영광을 다시 누릴 그곳을 꿈꿔왔었다.
하지만 이곳은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부상당한 몸으로 퇴역한 상처뿐인 자판기뿐이였다. 자판기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고 녹이슨 곳에서는 누런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우리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리 유행 지났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또 다시 좁고 어두운 곳에 갇히게 되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한물간 노땅들이 오셨네. 크크크"
그 녀석들은 우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요즘 나온 신상녀석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고 애송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한물간 삼류 취급을 당했다.
열심히 커피를 담아 내보내고 있는 종이컵이 말했다.
"오! 너희들 오랜만이군. 멸종된줄 알았는데 용케도 살아있었군. 난 바빠서 너희들을 신경 쓸 틈이 없지만, 알아서들 잘해보라고!"
그 말과 동시에 종이컵은 커피를 담아 아래로 내려갔고 새로운 종이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먼저 나간 종이컵은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찌그러진 채로 바닥에 굴렀다. 저것이 종이컵의 운명인가? 나는 당황해 온몸이 굳어지는 거 같았다. 우리도 저렇게 버려질 운명인가? 두려웠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녀석이 말했다.
"종이컵은 저렇게 돼야 제맛이지. 우리하고 종이컵은 질적으로 다르지. 우리 파이팅! 한번 합시다. "
'따야 맛!'
'따야 맛!' 을 외치며 자판기 안의 녀석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낡은 자판기는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건방진 신상녀석이 우리를 보고 너희는 무슨 맛이냐고 했다. 우리는 달콤 새콤한 오렌지 맛이라고 했고, 한때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맛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너희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을 지배했었다고 했다.
신상녀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물간 맛이네!"
나는 발끈하며 너희 맛은 무슨 맛이냐고 물었다.
"우리?, 우린 민트맛이다"
'민트맛?', 나는 민트맛이 무슨 맛인지 몰랐다. 옆에 친구가 치약맛이라고 했다. 나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충격적이었다. 치약맛이라니. 요즘 사람들은 치약을 먹는다는 말인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말했다.
"웃기고 있군, 누가 치약맛을 먹냐?"
그 말과 동시에 동전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제일 앞에 있던 민트맛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쿵 소리와 함께 두 번째 민트맛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당황했다. 몸속의 알맹이들이 굳어지는 거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세상은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광을 되찾기에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주말이 되자 대학로 골목은 사람들도 붐비기 시작했다. 커피를 담은 종이컵은 끊임없이 내려가고 있었고, 민트맛도 꾸준히 내려갔고, 다른 맛의 녀석들도 간간히 사람들이 찾아주었다. 하지만 우리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만 제자리에 머물러있었다. 한 번은 제일 앞자리에 있던 녀석이 지루했던지 입구에 걸터앉아 졸다가 내려가는 타이밍을 놓친 적이 있었다. 우리를 선택한 사람은 고장 난 줄 알고 자판기를 발로 쿵쿵 찼다. 자판기는 아픔을 못 견디고 동전을 토해내었다. 결국, 그 사람은 민트맛을 선택했다. 그 후로 우리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이 되자 밖은 사람들로 웅성이기 시작했다. 술 취한 사람들은 자판기를 흔들어댔고, 자판기는 고통스러워 끼익 끼익 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취향대로 음료수를 골랐다. 오래간만에 자판기는 분주히 움직였다. 민트맛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사과맛, 커피맛, 초코맛, 심지어 겨자맛까지 쿵쿵 소리를 내가며 이곳을 빠져나갔다. 끝내 우리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골목길에는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자판기만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좁고 답답한 어둠 속에서 나는 끝없는 좌절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곳은 창고처럼 춥지도 외롭지도 않다. 빛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있고, 무엇보다도 세상 속에 있다. 하지만 나는 외로웠다. 군중 속의 고독이 이런 기분 일까?. 모두 살아있는데 나 혼자서만 죽음 속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이것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친구들이 말했다.
"선배들은 모두 잘 살고 있을까? 그들은 기억할까?. 창고에 남아있는 후배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자판기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슬픈지. 그래도 선배들은 좋은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
창고에 들어가기 전 이제 막 만들어진 우리들을 운반하던 사람이 말한 적이 있었다.
"너희들은 다시 재활용될 거야. 이렇게 캔으로 만들어지거나,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재 탄생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땅속 어디엔가에 버려져 묻히게 되겠지."
나는 슬펐다. 우리들은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땅속에 묻히긴 싫었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 있고 싶었다. 영원하고 싶었다.
아침이 밝아오니 종이컵은 다시 바빠졌다. 연신 커피를 담아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다른 음료수들도 전방을 향해 진격하듯 하나씩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때 덜컹거리며 문이 열렸다. 주말 내내 팔려나간 민트맛들이 새로운 녀석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말했다.
"왜 안 팔리지? "
문이 닫히고 새로 들어온 민트맛이 말했다.
"이번에 새로 개발된 신상이 있는데 내일 이곳에 채워질 거래, 너희가 나가고."
나는 발끈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치약맛 따위 나는 녀석이 마음대로 지껄인다고 했다.
"야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잘 나갔는지 알아?"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눈물이 나려는 걸 참았다. 세상에 나오고 며칠 동안 가슴에 품었던, 우리 세상인 줄 알았으나 우리 것이 아니었던, 우리의 존재는 이미 잊혀진 그런 세상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다음날, 그 녀석 말대로 아무도 나가지 못한 우리는 자판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새로운 신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작은 비닐봉지에 아무렇게 쑤셔 박혔고, 여기저기 짓눌리고 부딪혀서 찌그러지거나 상처가 났다. 몸속에 작은 오렌지 알맹이들이 여기저기 부딪혀 터지기 시작했다. 몸은 부풀어 오르고 뚜껑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고통이 멈출 때 쯤 힘없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 작은 노인정에 도착한 것이다. 노인들은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늙고 거친 손으로 우리를 하나씩 집어갔다. 순식간에 우리를 담은 비닐봉지는 텅 비게 되었다. 나 역시 어느 노인의 손에 쥐어줬다.
"아이고, 이런 귀한걸. 고마워요"라는 말과 동시에 나를 잡은 노인은 내 머리를 따고 나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나는 행복했다.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구나, 우리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말이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우리도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말했다.
"그래! 이 맛이지. 이건 내가 기념으로 갖고 있겠어요." 라며 나를 마신 노인은 나를 가방 속에 넣었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노인은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내 몸속에 부드러운 흙을 채워 넣었고 그 안에 작은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햇볕이 드는 창가에 나를 두었다. 창가에서 보는 세상은 아름다웠다. 춥고 어두운 창고도, 좁고 답답한 자판기안이 아니었다. 넓고 따뜻한 세상이었다.
나는 작은 화분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나는 내 안에서 자라나는 작은 생명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