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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Nov 05. 2023

책으로 도망쳐 봤어요? 그 이후...

짧은 글

(이전 글, '책으로 도망쳐 봤어요'를 먼저 읽어보시고 읽어보세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글쎄요. 그 일이 있은 후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전 여전히 꿈속에 살고 있는 거 같고,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날 그 일이 있은 후에 선생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죠. 이제 조금씩 빠져나오라고요. 그래요 전 빠져나오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책은 이미 저를 지배하고 있었어요. 전 책으로 도망쳤고, 책이 저를 받아주었지만 책은 저를 순순히 놓아주지 못했어요. 책을 덮으면 등장인물들이 자꾸만 저를 불러요. 제가 잠을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자꾸만 저를 불러요. 그리고 꿈속에서 나타나 어서 책을 펼치라며 저를 깨워요. 그러면 저는 일어나 책을 펼치고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해요. 그렇게 책은 저의 모든 것을 지배했어요.


노력이요?

제가 왜 노력을 안 했겠어요. 저는 책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평온함을 느꼈지만, 책은 그렇지 않았어요. 책은 저를 구속했어요.  책이 저에게 그럴 줄은 몰랐어요. 저는 책을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책에게 모든 것을 바쳤는데, 책이 저에게 그럴 줄은 몰랐어요.

그곳은 지옥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어요. 책은 대답했어요. 저에게 '자살하는 법'이라는 책을 주더군요.


그래요 책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었어요. 내가 죽는 다면 책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행복을 찾아 책으로 도망쳤는데 책마저 저를 구속한다면 생을 마감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책은 저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었어요. 영원히 책 속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가슴에 품고 죽는다면 죽어서도 영원이 책 속에서 살 수 있을 거라 했어요. 저는 생각했요.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책은 내가 되는 거고, 꿈은 영원이 되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난 책에게 고마워했어요.


그날이 왔을 때 서재로 들어갔어요. 모든 문은 테이프로 막고 연탄하나를 사다가 방구석에 놓았어요. 책이 그랬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다고요. 전 책이 가르쳐준 데로 따라 했어요.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을 골랐어요. 그 책 속에서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었어요. 아무도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응원해 주는 세상이었어요. 책 속의 주인공 안나는  그곳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요. 사랑을 이야기하고, 슬픔을 이야기하고, 영웅을 이야기기 하고, 고통을 다루지만 결국엔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하죠. 전 그런 안나가 되기로 했어요. 내가 죽으면  난 책 속의 안나로 태어날 것이고, 안나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너무 기뻤어요. 책은 저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책은 끝까지 저를 책임지려 했어요. 책은 저를 구속하려 한 것이 아니고 도와주려 한 것이었어요.


연탄이 놓인 곳으로 가 연탄을 피웠어요.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가슴이 시큰거렸어요. 나는 서둘러 방에 누웠어요. 그리고 책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지요. 서서히 잠이 오기 시작했어요. 내가 안나가 된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되었어요. 눈물이 났죠. 그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고 행복의 눈물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는 꿈을 꾸었어요. 검은 어둠 속을 걸으며 찬란한 빛이 나오기를 바라며 걷고 있었어요. 이제 그 꿈은 내 현실이 될 거였어요. 안나를 만날 생각에, 내가 안나가 될 생각에 나는 계속해서 꿈속에서 달렸어요.

하지만 발밑에 깔린 진흙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어요. 가도 가도 끝없는 진흙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주변을 둘러봐도 끝없이 펼쳐진 검은 진흙뿐이었어요. 어둠 속에 나는 홀로 서 있었어요.  나는 두려웠어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눈은 뜨고 싶었어요. 하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어요. 나는 알았어요. 나는 책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을요. 책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었어요. 나를 지옥에 버린 것이었어요.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어요. 모두 거짓이었어요. 책은 저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저를 잡아먹어버렸다는 것을요.

 

그때였어요. 쿵 소리와 함께 진흙밭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끄집어 당겼어요.

그리고 눈이 떠졌어요. 눈을 뜨니 책들은 불타고 있었고, 뿌연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방관들이 나를 흔들고 있었어요.


전 그때 알았어요. 내가 책으로부터 도망쳤다는 것을. 책이 저를 버렸다는 것을.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책이 없더라고요. 책이 없는 집은 처음이었어요. 책장이 있던 자리는 화분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책이 내던 꿉꿉한 냄새는 꽃 향기들로 채워져 있었어요. 그리고 남편과 딸이 돌아와 있어요. 꿈꾸는 거 같았어요.  


선생님 전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어느 것이 현실이고 꿈인지 모르겠어요. 책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이젠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거겠죠.


"그럼요. 이제 그 무엇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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