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정말 오랜만에 서점엘 다녀왔다. 광화문 교보문고... 예전엔 그 분위기가 어쩐지 마음에 들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러다 언젠가 규모를 축소하고 내부를 바꾼 뒤부터 가지 않게 된 것인데, 이번에 다시 가보니 역시 좋았다. 서점이란 장소는, 적어도 내게는 위로를 주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책에 파묻혀 꿈꿀 수 있을 것 같다. 수 많은 이야기들이 무지갯빛 비누방울처럼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강하고 둔할 때는 그런 이야기들이 필요치 않다. 연약하고 예민해져 있을 때, 또는 몹시 지쳐 있을 때 나는 마치 마약을 찾듯 이야기를 찾는다. 현실을 잊게 할 마약으로서의 이야기가 무한 제공되는 장소가 있다면 그게 바로 서점일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바깥 세상을 잊을 수 있다. 그곳에 영원히 머문다면, 나는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들을 숨쉬고, 이야기들을 먹고 마시며, 한 이야기로부터 다른 이야기로 옮겨 다니는 삶. 그런 삶이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장소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그런 장소를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힘겹고 막막한 현실이 나를 옥죄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잠시 그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을 담담히 바라볼 수는 있었다. 어느 정도 차분한 마음으로 내게 일어난 일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사건 직전까지 누렸던 평화로운 날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다. 분명 그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러니 괴롭고 고통받던 시간마저도 어쩌면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집에서 떠나는 날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느끼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연락을 받고 찾아갔을 때 엄마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로 누워있었다. 움직일 수 없어서 새벽 내내 허공만 바라보며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엄마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병원이 답답해서 싫다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엄마는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이젠 병원에 가야겠다.
그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슬픈 감정보다는 본능적인 눈물이었다. 눈물을 얼굴에 느끼며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꼈다. 도망치고 싶었다.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가 나를 영영 가둬버리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도 나도 처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나름 계획을 세웠다. 그것도 몇 년이 지난 후의 일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날은 멀지 않았던 거다. 이렇게 불시에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이 닥치고야 나는 알아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그날을 각오하고 있었음을. 구급대원이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담담했다. 내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슬펴야 하는데 왜 담담한 거지?
마치 그 답을 찾으려는 듯 나는 응급실에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을 비로소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굴 여기저기엔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들이 있었고 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간호사가 보이지 않는 혈관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바늘로 찔러대자, 검게 바짝 말라버린 엄마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순간,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이 우리 엄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검사결과가 나와 담당 의사를 만나러 갔다. 나이가 지긋한 그 의사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간병인이 있는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거라 했다.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곳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나는 담담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멍한 채로, 요양병원을 알아보았다. 그리로 모셔가기 위해 엄마를 뒷좌석에 태웠다. 엄마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도착해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그병원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 그곳은 이제까지 엄마가 계셨던 말 그대로 요양을 하기 위한 요양병원과는 달랐다.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개미집처럼 보였다. 왠지 모르게 차갑고 어두운 느낌의 공간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계적인 사람들과 곳곳에 누워 있는 환자들. 게다가 대변 냄새와 소변 냄새가 진동했다. 간호사들은 표정이 없었고 직원들은 고개를 들지 않고 우리를 응대했다. 그 전의 요양병원은 그나마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날을 절박하게 기닫리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장소였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복도를 걸으며 지나친 방들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백발의 노인들이 가득했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배정된 방에 들어가자 이미 5 명의 노인들이 천장만 보고 누워있었다. 어두운 커튼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마저 어두워 보였다.
조선족으로 보이는 간병인이 엄마를 침대에 눕혔다. 엄마는 간병인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엄마의 말에 나는 눈물이 울컥 쏟아졌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간병인은 곧바로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엄마에게 성인용 기저귀를 채웠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끓어오르는 내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켰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현대판 고려장인가? 죽음으로 내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뭔가?
병원을 나와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다른 요양병원을 알아보았다. 이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여동생도 동의했다. 엄마를 좀 더 좋은 곳에 모시고 싶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이전보다는 깨끗한 환경의 병원을 찾았다. 나는 입원 1시간 만에 엄마를 퇴원시켰다. 우리를 붙잡는 관리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곤, 뒤도 안 돌아보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엄마! 다른 곳에 가자!
거긴 좀 더 좋아
미안해 엄마...
어쩌면 나는 이미 엄마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미움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보내야 할 때, 부모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혈육과의 이별의 날이 오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우리 모두는 겪어야 한다.
새로운 병원은 친절했다. 밝은 빛이 들어오고 쾌적했다.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들 사이에 약간의 희망과 위로가 공기처럼 떠돌고 있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입원절차를 마치고 간병인에게 엄마를 부탁하며 봉투를 건넸다. 그러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나는 다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담담해지고 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나를 조종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감정이 없는데도 일상으로 돌아오기는 힘들었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엄마가 문득문득 생각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불과 며칠 전에 엄마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었지만 이제는 엄마는 더 이상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엄마는 분명 살아계신데 이 세상에 없는 사람 같았다. 전화를 하고 싶어도 전화를 할 수 없는,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는데도 다른 세상에 있는 거 같은 그런 대상 같았다.
나는 주말마다 엄마를 보러 간다. 갈 때마다 엄마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평소 냉랭하던 엄마는 살가워졌고, 말이 없던 엄마는 소녀처럼 말이 많아졌다. 외모는 점점 쪼그라들고 신체기능은 점점 쇠약해져가고 있는데 성격은 밝아지고 있다. 희윤이가 말했다.
-규호 씨 어머니가 귀여워지셨어
엄마의 섬망증상도 점점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본인의 잃어버린 젊은 시절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엄마에게도 즐거웠던 기억이, 천진난만하고 귀여웠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잠시라도 그 시절을 찾아서 행복했으면 했다. 우리를 잊을지라도, 우리에게 낯선 모습의 엄마라 할지라도, 시한부 인생이라 할지라도, 병원에 누워만 지내야 하는 마지막 삶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각자가 원하는 결말이 있겠지만 삶이라는 것은 잔혹하게도 그 결말을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원하는 이야기를 쓰게 두지도 않는다. 우리의 이야기는 엄마도 나도 원하는 이야기의 결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중간에 책을 덮을 수도 다른 이야기를 고를 수도 없다. 끝까지 읽어내야 한다. 비록 엄마의 이야기는 슬픈 마무리가 되어갈지라도 엄마의 꿈속에서는 본인의 원하는 행복한 결말이 되었으면 바란다. 그것이 아들의 마지막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