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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책방 Mar 13. 2024

연모

어른 동화

그는 단 한번, 맑은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두 눈이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미끼를 무는 물고기처럼, 먹을 것을 갈구하는 고양이처럼, 벼락이 떨어진 곳을 바라본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날도 어머니 드릴 약초를 구하러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마른하늘에 날 벼락이 내리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벼락을 맞은 바위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였던가. 아니면 필연이었던가. 하얀 연기가 사라지자 붉은 꽃이 바위 위에 피어있었다. 그는 저 꽃을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싶었다. 그의 어머니는 는 수년째 병환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셨다. 약초를 구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드리고 싶었으나 10년째 그렇다 할 약초를 구하지 못했다.  


그는 꽃을 꺾기 위해 붉은 꽃이 피어있는 바위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지 바위 위에는 붉은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 빛나는 붉은 치마는 장미처럼 보였다. 처음엔 좌절하여 우울한 마음에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깜빡이고 머리를 흔들어보아도 바위 위에 여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귀신일까 하는 마음에 지나치려 했지만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먼저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바위아래에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는 여인이 보였다. 여인의 얼굴은 평소 그기 꿈에서 보았던 여인이었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10년 전부터 올해까지 시험 전날이면 매번 그녀가 나타나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뭘 하는 것이오


여인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 꿈에서 그런 것처럼 묘한 웃음이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십 대 중반에 상투를 틀지만 그는 이제껏 눈길 한번 없이 어머니께 드릴 약초만 구하러 다녔다. 그때 갑자기 여인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깜짝 놀라며 여인을 잡으려 했지만 비 끄러 지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하지만 여인은 깃털보다 가볍게 땅에 내려왔다. 그는 메뚜기가 튀어 오르듯 재빠르게 일어섰다. 얼굴에 상처가 나고 욱신거렸지만 눈앞에 서있는 여인을 보며 정신이 혼미했다. 여인에게서는 장미향이 났다. 여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보름달처럼 커다랗고 둥근 눈에 눈썹은 초승달처럼 진하게 휘어져있었고, 오뚝한 콧날에 하늘을 가를 듯했다. 여인은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인의 눈을 보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남자는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남자는 고개를 떨구며 아이가 울음을 토하듯 여인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남자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누구 앞에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여인은 어머니가 해주셨던 대로 남자의 등을 토닥였다. 남자의 울음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울음을 그친 남자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워진 남자는 애써 감정을 누르고 여인에게 물었다.

 

-바위에는 왜 올라간 것이냐?

-달을 보고 싶어서요

-달이라면 꼭 바위에 안 올라가도 잘 보이지 않느냐

-진짜 달을 가까이서 볼 수 있잖아요.


별난 여인이었다. 여인은 달에서 왔다고 했다. 말하는 여인의 큰 눈에서는 달이 보였다. 

이름을 물었으나 알려주지 않았다. 기생은 아닌 것 같고 양가집 규수도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길과 손길과 발길, 모든 길이 여인에게 향했다. 그는 꿈에서도 여인을 보았고 깨어서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여인을 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약초를 구하는 일을 잊은 채 매일 같이 여인을 보기 위해 바위로 갔다. 

그때마다 남자는 여인을 볼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술을 비웠다. 술이든 무엇이든 비우면 언제나 눈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남자는 죄책감이 들었다. 어머니의 병환을 잊은 채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여자를 생각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오랜 세월을 자유롭고 싶었다. 그리고 여인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온전하지 못한 마음을 떠나오고 싶었다. 그러면 온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처 없이 바람이 부는 곳으로 흘러 다녔다. 


걷고 또 걸어서 발길이 닿는 곳에는 파도가 치고 있었다. 파도는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너머에 나의 여인이 있을 거라 말이다. 살아 숨 쉬는 남자의 연모가 저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고, 깊은 어둠에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잿빛파도가 해안을 덮치며 하얀 거품을 몰고 왔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아직도 여인을 잊지 못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언젠가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입소문은 무서운 것이라 하셨다. 어머니가 아픈 와중에 정체도 모르는 여자에 빠져 정신이 나갔다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거라 하셨다. 아버지는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가문의 이름에 똥칠이나 한다고 하셨다. 그가 떠나는 날 형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세월이 흐르면 깎이고 깎여 사라지게 되어있다. 모두 날려버리고 돌아오너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변하지 않기 위해 떠난다는 것을. 변하는 것이 두려워 떠난다는 것을 말이다. 


파도소리가 잦아들 때쯤 여인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리를 쫓아 바다로 달려들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파도가 사리진 자리에는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가 찾아 헤매던 여인이었다.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여인은 말했다. 


-나리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바닷바람에 몸이 상할까 걱정됩니다. 


남자는 말했다.


-조금만 더 있겠네. 내 힘들게 당신을 만났네.


여인은 물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남자는 다시 대답했다.

-당신에게서 연모의 정을 느꼈네. 당신을 놓치기 싫다네


여인이 다시 물었다.


-저를 만나서 연모를 얻으셨습니까?


남자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당신을 찾아 헤매었고, 하염없이 당신을 기다렸네.  결국엔 만났지만 여전히 당신은 내 손에 잡히지 않는구나. 자네를 만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인은 대답했다. 


-하늘의 달은 하늘에 있으때만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다에 비취는 달은 흐트러지기 마련입니다.

날 맑은 밤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여인은 그렇게 사라졌다.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비와 거센 파도에 달은 끊임없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며칠을 비가 내렸다. 나흘째 되던 날 날이 맑았다. 약속된 날이었다. 남자는 큰 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붉은 치마와 새하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떠올렸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기다렸지만,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남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친구에게 그간의 일을 말했다. 


-나는 연모를 찾아 산으로 바다로 떠났네. 지나는 곳마다 여인에 대해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미친 사람 취급이었지. 연모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지도 의심스러웠다네. 헛되이 시간을 보내며 바다에 다다랐을 때 그 여인을 만났다네. 그리고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지만 결국 나는 만나지 못했네. 한심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네. 밤낮으로 여인을 기다리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어느 어부가 가르쳐주더군. 달이 물에 비춘 것은 그것이 달이라서가 아니라 바다였기 때문이라고. 그제야 깨달았지 그녀가 왜 그토록 바위 위에서 달을 가까이 보려 했는지 말이야. 진짜 달의 참뜻을 말이야. 나는 깨달았네.. 어쩌면 연모라는 것이 그런것라는 것을. 만지고 싶지만 만질 수 없는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는


집에 돌아온 남자는 다시 약초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여인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의 여인은 다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행복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남자는 알았다.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기분으로 어머니를 꼭 낳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여인을 보았던 바위를 찾아갔다. 바위 위에는 빨강 장미가 바위를 덮고 있었고, 바위아래 여인이 서있었다. 남자는 여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여인의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여인의 얼굴을 천천히 보았다. 여인의 얼굴은 어느덧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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