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여름 그날, 이제 막 해가 지려할 때쯤 달콤한 풀냄새가 종로 거리를 흘러 다녔다. 인사동거리를 지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피맛골 골목에 들어가면 초입에 오래된 4층짜리 회색건물이 있다. 해가 넘어가면서 만들어진 그림자가 회색건물을 잠시나마 황금색으로 물들인다. 나는 건물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한숨을 쉰다. 그것이 나만의 각오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4층에 올라가면 오래된 일본어 학원이 있다.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 카운터에 작고 까무잡잡한 여자가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보자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 앞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신경 쓸 틈이 없다는 듯이 그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종이 울렸다. 종은 쉬지 않고 한동안 울리더니 그 남자가 들어가고 교실문이 닫히고서야 그쳤다. 종이 그치고서야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강하려고 하는데요.
그녀는 곧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고 인적사항을 적으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외모는 독보적이며 이국적이었다. 백오십이 안 돼 보이는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짧은 머리에 짙은 쌍꺼풀의 눈, 거기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큰 외투를 이불처럼 둘둘 감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외투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한국사람 아닌가? 라며 중얼거리며 수강신청을 마쳤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면서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본을 선택한 이유는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일본 영화 '러브레터' 보았는데 영화 속 배경과 배우들의 얼굴에 홀딱 반했다. 눈으로 덮여버린 배경은 내가 꿈속에서나 보던 그런 세상 같았다. 물론 모든 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모두 영화를 통해서만 보고 들었을 뿐이다. 일본 배우들의 얼굴은 한국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고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들 속에서 살고 싶었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학원에 갔을 때 어제와 똑같이 그녀 앞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인사를 건네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공부했기에 나는 중급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업종이 울리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밖에 서있던 남자는 강의실로 들어와 내 옆자리 앉았다. 그날 나는 그 남자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석호였고 나와 동갑이며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단지 영화를 보고 일본에 가고 싶다는 나와 비교가 되자 얼굴이 붉어졌다. 석호는 내년에 그녀가 사는 일본에 갈 거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 질문에 석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를 안내 데스크에 있는 그녀에게 데리고 같다. 그리고 나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 인사해 여기는 미호!
미호? 일본사람? 이국적인 외모였지만 한국말을 잘해 일본사람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심장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일본사람을 처음으로 현실에서 보았다.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영화에서만 보던 일본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말을 할까? 왜 한국에 왔고, 왜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까? 하지만 석호는 둘 사이에 내가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만큼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 했다. 내가 아무리 순수하게 다가간다 하더라도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아니 없었다.
나는 우연히 수강생 회식자리에서 일본어 선생님에게서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 알아냈다. 그녀는 사람을 찾으러 한국에 왔고, 그 사람을 찾지 못해 찾을 때까지 학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에서 잠시 만난 한국인 유학생을 잊지 못해 무작정 한국에 온 것이고 대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종로 학원가에 온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석호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내가 그녀에게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왔다는 것.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그녀는 왜 잠시 만난 외국사람을 못 잊어 먼 이국땅까지 홀로 와있는 것일까? 그녀도 일본을 떠나고 싶었을까? 그래서 내가 우연히 본 영화를 동경해 무작정 일본으로 떠나려 한 것처럼, 그녀도 무조건 한국으로 떠나온 것일까?
내가 어린 시절, 진정으로 나를 예뻐해 준 사람은 할머니뿐이라고 생각했다. 기회가 되면 할머니를 만나라 혼자서 버스를 타고 할머니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내가 시험을 못 봐도, 말썽을 피워도 조건 없이 나를 예뻐해 준다.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내가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가면서 할머니를 점점 잊어갔다. 심지어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시험기간이라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할머니가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아니, 인정하지 못한 것을 수 도 있다. 문득 할머니를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처절한 외로움을 느꼈다. 슬픔을 느꼈다. 난 혼자가 됨을 실감했다. 그녀도 그런 사정이 있을 거라 내 마음대로 상상했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그녀의 그리움이 무엇 때문이지 알고 싶었다. 석호가 그녀에게 말을 걸 때면 그녀는 항상 자신의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 손을 따라가 보면 손금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손금을 해독하면 그녀의 뜻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날 그녀를 우연히 처음 만나것은 성대 앞의 오락실에서였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집어삼킬듯한 외투로 온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외투 위로 삐져나온 얼굴속의 쌍꺼풀진 눈만이 모니터를 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너는 무척 아름다운 일본여자도 내가 동경하는 세상에서 온 천사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내가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なに? (뭐해?)
나는 평소에 그렇게 대담한 짓을 하지 않는다. 워낙 낯을 가리기도 하지만 이대로 흘러가면 영원히 이유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한국을 떠나고 싶을 이유를 그녀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물었다.
-あなたは韓国で何してるの?(너는 한국에서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