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생활 수급자이자 저소득층 한부모 가족인 나는 여러모로 스스로 찔리거나 자책을 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취향의 문제다.
첫번째 찔림. 이혼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왜 서울에서 살아? 집값싸고 도와 줄 일가친척이 있는데 가서 살아야지?
서울이 3교대를 하지 않는 일자리도 많고 여러모로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정책이 많을 꺼라 생각해 어차피 도와줄 친정이 없는 것과 진배없는 나는 이혼 후 새롭게 살아갈 장소를 서울로 정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라는 이유와 함께 워낙에 내가 서울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저 어렸을 때부터의 나의 취향의 문제인데 내가 영화, 책, 공연, 전시 등등 이런 것들을 너무 좋아했다. 나는 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늘 세상에 대해 미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취향들은 6살일때나 지금 36살일때나 바뀌지를 않았다. 서울은 내 취향저격이다.
두번째 찔림. 아니 그렇게 돈도 없고 양육비도 못받는데 왜 나가서 돈을 벌지 않아? 한살이라도 어릴 때 안정적인 직장을 잡았었어야지?
처음부터 이렇게 무직의 기간이 길어질 줄은 정말 진실로 말하는데 나도 몰랐다. 서울에 와서 첫 일년 정도는 나도 힐링도 좀 하고 아이랑 추억도 좀 쌓고 서울살이도 적응하고 일자리를 천천히 구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받은 퇴직금도 꽤 되었기에 크게 걱정 않하고 지내다가 돈이 떨어질 쯤 되어 ‘광진구 보건소’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채용되어 관내의 ‘주민센터 방문 간호사’가 되었다.
무기계약직이라 안정적으로 애를 키울 수 있겠거니 하고 좋아했는데 생각보다 나랑 맞지 않는 일이었다. 공무원 특유의 양심에 어긋나는 관행과 간호직 공무원의 업무가 하청식으로 무기계약직인 나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리는일이었다. 9개월 쯤 되었을 때에는 쌓이던 스트레스가 터져버려서 몇년동안 재발하지 않았던 장 게실염에 걸려 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할 것 같다는 무시무시한 의사처방과 함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에는 아이가 다니던 기관에서 퇴소를 하게 되는 일이 생겨 꼼짝없이 경제 활동도 할 수 없고 가정보육을 해야하는 기간이 꽤 오래 있었다. 또 중환자실에서 5년간 근무하며 환자 체위 변경을 하다보니 늘 손목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무거운 아이를 늘 혼자 안던 어느 날부터 손목이 너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 또한 손목에 뼛조각이 떨어져 나갔으니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한다는 무시무시한 의사의 처방을 받게 된다.
나는 병원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딱히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혼자서 제왕절개나 맹장염 수술 정도는 잘도 받으러 다녔다. 입원이야 원래 제발로 걸어가서 제발로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처방이 무시무시한 것은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수술을 하러 가면 아이를 누가 봐주나? 할 수 없이 재활 치료를 선택했고 이마저도 치료받을 때마다 회당 10만원이 넘어 자주 가지 못했고 통증은 2년, 3년이 지나도록 나아지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마냥 흘러갔고 코로나19도 터졌다.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고 가정 보육을 해야하는 상황이 또 점점 많아졌다. 코로나 상황 속에 겨우 구했던 알바마저도 며칠지나 내 가정상황을 알게 되더니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는 이제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번에는 아이가 학교에 조금만 적응하면 빨리 일을 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담임샘, 돌봄샘, 방과후샘, 피아노샘, 위클래스샘까지 정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학교에 학원에 면담을 하러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1학년 2학기도 한참 지난 11월이 되어서야 ADHD로 최종 진단명을 받게 되었다. 종합발달검사, 주의집중력검사, 놀이 치료, 감각통합치료 등등 병원에 갈 일이 꽉 들어찼는데 정말 병원에 학교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비어있는 시간은 없는지 저희 좀 진료 좀 빨리 봐주세요 하고 말이다. 검사를 빨리 받고 진단명이 확정 되야 약을 복용할 수 있고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2월 아이는 아직도 맞는 약을 찾지 못했다. 이제 다시 또 새로운 약의 적응기간을 갖게 되었다. 방학 동안 돌봄 교실에서 충동성을 이기지 못하고 남의 물건을 훔쳐오는 일도 여러차례였다. 아이 담임선생님께서 신신당부하신 대로 겨울방학내내 공던지고 받기 연습도 하고, 아침마다 등산도 다니고, 저녁마다 책을 사서 엄마표 감각통합놀이도 해주었다. 클레이 만드는 방법도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가르쳤다. 물론 2학년 1학기 예습도 빼놓지 않았다.
아파서 일을 못할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고 충분히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것을 취향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자꾸만 고민하게 되는 까닭은 여느 다른 엄마들이라면 아이가 아프고 내가 아파도 경제적으로 이렇게 어렵다면 손목이 부러지더라도 밖에 나가 돈을 벌었을 것 같아서이다. 내가 그런 슈퍼맘같은 엄마들처럼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체육을 못해 같은 편이 되기 싫어해 친구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나는 일을 하러 나가기가 어려웠다. 대신에 동네 뒷산에 올라 계단 오르고 내리기, 공 던지고 받기, 줄넘기 등을 연습했다. 아이가 매번 알림장을 제대로 써오지 못했을 때 나는 일을 하러 나가기가 어려웠다. 대신에 2학년 1학기 책을 같이 세번씩 소리내어 읽어보고 5줄씩 알림장에 적어보는 연습을 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이 있다는 점, 당장 필요한 돈보다 내 손목이나 아이의 건강을 더 높은 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취향이 있다는 점. 전부 다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양육비도 받지 못하고 도와줄 일가친척도 없는 타지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싱글맘이 가져서는 안될 몹쓸 취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