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핑의 시작
그래. 밥은 먹었고?
아시아권에서 섭취하는 '밥'은 전통적으로 먹어왔던 곡물(벼, 밀, 옥수수, 콩 등)을 이용한 모든 주식의 총칭이라고 한다. 자연스레 '밥=쌀'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 그 밥은 곡물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바뀌고 있다. 무엇보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에게 건넬 많은 문장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자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의 안부를 물으며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양조장을 운영하면서는 안부를 묻는 사람이 더 늘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날씨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됐다. 작년은 변덕스러운 날씨가 지속됐는데 여름엔 집중호우, 무더위가 반복됐고 우산 없이 출근했다 비를 맞고 돌아오는 날이 빈번했다. 그러다 단풍이 물들어야 할 11월엔 갑자기 반팔을 꺼내 입었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열대지역이야. 해외여행 안 가도 되겠어…… 체감상 변덕스러운 본인 기분보다 예측이 불가능한 까다로운 녀석이 날씨였다. 그럴 때마다 일찍이 출근해 양조장과 매장을 정비하면서도 우린 꼭 한 마디씩 덧붙였다.
"괜찮으실까요?"
"그러게요... 큰 피해는 없으셔야 할 텐데..."
"한번 연락드려보죠!"
농부님이었다. 긴 시간 연이 닿아 지금은 우리 양조용 쌀을 맡아 주고 계신 분이다. 이렇게 작은 규모의 양조장이 쌀 계약 재배를 하기는 쉽지 않고 또 농부님도 큰 결정을 하신 걸 텐데 처음부터 전분, 단백질, 도정률 등 서로가 하는 질문과 대답이 튕겨나가지 않고 잘 꿰어진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우리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농부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농업이란 건 긴 호흡이 필요하다고. 본인도 양조에 적합한 쌀은 큰 시도고 모험인데 우리를 통해 배워가는 거라고. 우리도 조급해하지 않고 2년 3년, 천천히 농부님과 함께 배워가기로 했다.
"농부님 괜찮으시죠?"
"아유 네! 저흰 큰 피해 없고요. 이번엔 농사가 정말 잘 됐어요"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우린 농부님을 걱정한 거다.) "
농부님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술을 빚다 보면 쌀은 가장 기본이 되고 가까이하는 원재료다. 그런데 나고 자란 땅에서부터 모종을 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봐 오면 반려 식물처럼 쌀과 미묘한 감정선이 연결된다. 그 쌀을 농사짓는 농부님과는 당연히 자연스레 한 몸이(?) 되고. 그렇게 농부님과 농업을 곁에 두면서 자연스레 쌀을 돌보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기 시작했고 품종, 특성, 이를 술에 접목했을 때 등 관심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과정에 잠시 다른 원물로 넘어간다. 바로 커핑 행사였다. 작년 여름 우리 술에 들어갈 커피를 고르기 위해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공간에서 커핑을 진행했는데 다른 로스터리에서 몇 차례 참여한 경험은 있지만 '술에 어울리는 커피'를 주제로 했을 때는 또 다른 인상을 주었다. 언젠가 커피처럼 우리 술의 원재료인 쌀도 동일한 컨디션에서 품종마다 맛, 향 등을 파악해 보는 걸 진행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밥핑'의 시초였다.
혹자는 품종의 차이가 술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또 소비자들이 술을 구매하는데 품종 같은 건 아직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직접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우린 다양한 부재료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전에 쌀, 누룩 등 원물의 특성을 알고 이를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단일 품종의 계약 재배를 시작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책도 구매하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그 과정에 토종 농산물도 알게 되고 관련 세미나를 참여하거나 궁금한 건 농부님께 이래 저래 여쭤보기도 했다.
이 막연한 탐구에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한 건 '국립농업과학원' 덕분이었다. 국립농업과학원에서 토종 식품 자원이 식품 산업, 특히 외식 적용을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계셨는데 그에 맞게 직접 브루펍 공간의 음식이나 우리 술로 풀어내는 긴 호흡의 프로젝트를 제안 주셨다.
수많은 토종 농산물 품종 중 우리가 작업해보고 싶은 몇 품종을 선택하기 위해서 '커핑'처럼 관심 있는 누구나 그 다양성을 경험하고 참여할 수 있는 행사로 먼저 방향을 잡았다. 또 지금이야 다양한 토종 농산물을 경험하고 원물의 특성 파악에 초점이 되어있지만 추후엔 어울리는 토핑을 하나씩 얹듯, '김', '명란', '국밥' 등에 어울리는 하나의 쌀 품종을 찾아보는 다양한 형태로 콜라보 확장도 가능할 것 같았다.
우선 <밥핑> 부제로는 '토종 농산물 탐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20여 종의 토종쌀, 콩 중에서도 내부적으로 마음에 드는 1차 라인업을 추리기로 했다. 또 전체적인 프로그램 시간, 동선 등을 체크하기 위해서는 직접 밥핑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 번에 5종씩 총 3~4 섹션. 섹션별로 토종 멥쌀, 콩, 찹쌀 등을 나누고 동일한 환경에서 취사를 했다. (동일한 환경에서 소량으로 밥 짓기에 적합한, 찜 기능도 있으며 또 공간에 어울릴만한 디자인 등 여러 조건을 따져가며 밥솥 5개를 구매했다. 쿠쿠 담당자님 혹시 보고 계신가요?)
담당 연구원님이 추천해 주신 기본 작업, 쌀과 콩 수분량에 적합한 물의 양, 세척, 순서 등을 참고하며 우리 환경에 맞는 디테일을 덧붙였다. 실제로 연구 작업을 하실 땐 더 정확하고 디테일한 조건으로 진행하신다고.
그렇게 모든 사전 작업이 준비되고 품종마다 플레이버 휠을 참고해 각자 맛, 향 등을 평가하기로 했다. 솔직히 왠지 모를 자신이 있었다. 나름 몇십 년 쌀 밥을 먹어온 우리잖아?
결과는 어땠을까. 4번째 품종쯤 되니 점점 배가 부르고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전통주, 맥주 관련 자격증도 따며 짧지 않은 시간 감각을 트레이닝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술, 커피 등과 또 다른 결이었다. 쌀과 콩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분석하면서 먹은 경험은 거의 전무하니까.
그래도 같은 멥쌀 중에서도 형태, 색깔, 찰기의 차이, 향이 있는데 구수한 향이 나거나 화사한 꽃 향이 나는 것 등 미세한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어떤 건 상상과 전혀 다르게 맛의 전개가 펼쳐진 것도 있었다. 멥쌀을 줄곧 먹다 콩으로 넘어가니 이렇게 다채로울 수가! 이야 찹쌀은 그냥 맛있네!!! 그렇게 여러 회차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을 해온 덕에 2-3시간이 훌쩍 지났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팀원들끼리 후기를 공유했다.
운영, 동선에 여러 피드백을 주고받고 최종적으로 멥쌀 5종, 콩 5종, 찹쌀 5종. 총 15가지의 토종 농산물을 선택했다. 사실 본 행사를 할 땐 사람들이 쉬이 지칠 수도 있으니 5~10종 정도로 끝낼까 싶었지만 처음이다 보니 다양한 품종을 경험할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고, 연구원님께서도 직접 밥핑 행사에 함께 해주시며 각 품종에 대한 설명이나 부족한 부분에 완성도를 높여주시기로 했다.
아니. 양조장이 술 잘 빚으면 되지 이런 것까지 굳이 왜…… 할 수도 있겠으나 사전 미팅 때 인상 깊었던 답변이 있다.
연구원님. 왜 토종쌀이나 콩 등을 연구하시나요?
토종 농산물을 보호하고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예요. 토종 농산물은 육성이나 수입된 품종에 비해 경쟁력이 적고 대량생산/판매가 어려워요. 그렇지만 이 친구들의 장점을 뽑아 특성에 맞는 메뉴 개발로 이어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토종 농산물을 접하고 또 소비할 수 있는 선택권이 생기게 되겠죠. 그래서 외식이나 관광 등 다양한 분야로 접목해 중요성을 알리고 활성화가 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해요. 결국 우리 것이잖아요.
꼭 토종 농산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실 테지만 시중에는 외래 품종이 많고 또 우리가 사 먹는 쌀은 단일 품종보다는 다양한 품종이 섞이거나 갓 수확된 것과 보관 기간이 오래된 것들이 그냥 뒤섞여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제 아무리 실험 정신 투철한 농부님이 여러 테스트를 거쳐 농산물을 수확하더라도 결국 이런 과정을 겪으면 그 노력과 가치를 소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만약 소비자인 우리가 이런 품종의 다양성이나 특색을 알고 먼저 찾게 된다면, 혹은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제품들이 시중에 더 많아진다면.
밥핑은 결국엔 그런 것과 닿아 있다. 농산물 품종에 따라 직접 맛과 향을 관심 있는 소비자들과 함께 테스트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 알고, 실생활에 접목하는 방법까지 모색할 수 있는. 그 매개체가 꿀꺽하우스, 또 우리가 빚어가는 술과 음식이 됐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제가 쌀농사를 몇 대에 걸쳐 해왔는데요. 주변에 농사를 포기하고 건물 올리는 분들이 많아지셨어요. 저희도 다음 세대가 물려받지 않는다면 지속할 수 없을 거예요. 직접 쌀농사 짓고 밥 해 먹던 우리가 앞으로는 쌀을 수입해서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니까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셨지만 김해에서 만난 어떤 농부님의 말씀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사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 밥은?"이라는 말이 진짜, 우리 농산물이나 품종의 안부를 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니까. 오늘 중 한 끼는 쌀로. 밥심으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