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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 상담사 Sep 15. 2021

첫 상담 종결의 기억, 그리고 오늘의 종결 일지

우린 서로가 서로의 상담자였다

201X년 9월 11일 일기 중 발췌

 

상담자가 되고 내담자를 만난 뒤 첫 종결이다. 

아릿하고 설레고, 벌써부터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마지막 종결회기에서는 그동안 어떤 이야기를 해왔고, 상담 전에 비해 변화가 있었는지, 상담에서 인상깊었던 점, 아쉬웠던 점, 상담에서 도움이 되었던 상담자의 반응, 반대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상담자의 말이나 행동들을 얘기하면서 정리한다. 


이 친구의 상담 전에 했던 심리검사와 사후에 한 심리검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나의 첫 내담자를 이분을 만나서 너무 나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내담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상담을 정말로 그만뒀을 수도 있다. 다른 사례들이 너무 힘들었고 성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상담사가 될 자질이 없나보다 생각했었다. 


이분이 그동안의 변화를 스스로 자각하고, 나에게 감사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벅차올랐는지 모른다. 오늘은 하루종일 너무 즐겁고, 행복하고, 구름위에 떠 있는 기분이 뭔지 알 거 같았다. 게다가 작은 선물까지 주셨다. 정말... 소설책에서나 봤는데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선물을 준다는 건 정말.. 교과서에서나 보던 일이지 나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감사하고 내가 아는 모든 상담계 밖의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내가 이렇게 뭔갈 대대적으로 자랑한 건 대학 합격 이후 처음인 거 같다. 


정말.. 이 경험은 소중하게..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겠다. 


내담자는 나를 만나 변했고, 나를 만나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아니다. 내가 내담자를 통해서 변했고, 내담자 덕분에 지금까지 상담을 때려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린 서로가 서로의 상담자였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에게 상담 받아줘서 너무 고마워요. 마음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있답니다. 잘 가요 나의 첫 내담자. 


주변 원로 상담자들, 경력이 오래되신 상담자들에게 첫 내담자가 기억나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기억난다고 하신다. 얼굴도, 이름도,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상담실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기억나신다고. 그만큼 상담자에게 첫 내담자는 이토록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내담자들은 모르겠지. 그들이 상담자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어쩌면 우리는 약간의 사기꾼이라 패를 다 보여줄 수가 없다.  당신을 만나기 전 얼마나 긴장하고, 불안하고, 떨리고 설렜으며, 상담이 시작되고 나서는 매주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했는지. 


나는 아직 그런적이 없지만, 책에서 혹은 공개사례발표에서* 보면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선생님은 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시잖아요, 상담시간만 벗어나면 제 생각 안하시죠? 저는 선생님에게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그냥 많은 내담자 중에 하나잖아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 공개사례발표: 상담자가 다른 상담자들 앞에서 자신의 사례를 발표하는 것. 공개적으로 열리는 슈퍼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도 내담자의 인적사항은 철저히 가려진 채로 이뤄지고 사례회의장 밖으로 내담자의 자료반출도 금지된다. 


음. 내가 이런 이야기 들었다고 상상만 해도 억울하다. 나는 그 사람을 한 시간 봤지만 나머지 167시간동안 침습적으로* 내담자에 대해서 생각나서 내 할 일도 잘 못하는데. 잠시 쉴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내담자 생각을 해서 한동안 고생이 많았거든. 흥칫뿡.

*침습적 사고: 침투적 사고. 원하지 않는데 불쑥불쑥 생각나는 것.  


<갑자기 분위기 요리채널>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는 대체 뭘 먹어야 할까 고민하다 

집에는 알배추를 한장씩 뜯어서, 뒤면을 칼등으로 퉁퉁 쳐서 평평하게 만든 후, 

부침가루와 물을 1:1로 섞은 반죽에 걸죽하게 적셔 고소한 기름에 부친 알배추전을 먹기로 결정했다. 


알배추전만 먹으면 좀 배고프니까 


올리브유에 마늘을 조금 넣고(한국인의 마늘 조금은 한 줌) 새우를 굽는 거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점심에 먹고 남은 바질 페스토 펜네 파스타위에 얹어서 먹는 거지. 우웅.. 너무 좋다. 일단 슈퍼비전 자료 먼저 만들어야지 


2021년 오늘의 종결일지 


그동안 새로운 내담자를 만날 때마다 내 마음에 내담자가 사는 방이 하나씩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종결이란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드나들던 그 방의 문을 마지막으로 닫고 나오는 것과 같다. 내담자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기 전까지는 먼저 열어볼 수 없는, 아마 열리지 않을 문. 


그 안에서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길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는 수밖에 없다. 


수련기간동안 내 마음의 생긴 방들은 조금도 흐릿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한 때 과거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기억하는 나의 능력은 저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에 땅에 하나씩 늘어나는 방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gift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기쁘게 문을 닫고 나오면서 이런 걸 업으로 삼는다는 건 꽤나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일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번 내담자가 상담기간에 이뤄낸 변화들은, 정말 약물 치료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였다. 여러 이유로 먼지에 덮여 있었던 내담자의 존재적인 반짝임을 다시 세상에 내어 보이는 작업이었다. 내담자가 죽고 싶었던 이유는 정말 생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음을, 내담자가 스스로 답답해했던 행동들은 생존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스스로가 생각했던것보다 멋지고, 능력있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고 내담자의 입에서 듣는 순간 정말 기뻐서 눈물이 났다. 


상담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그대를 도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대도 나를 도왔다고. 그대의 아픔이 치유된 만큼 나의 아픔도 치유되었다고. 그대의 방은 내 마음에 언제나 있을 것이며 닫힌 방문을 바라만 보는 것으로 나에게는 큰 힘이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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