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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정 Aug 29. 2020

밥을 먹다, 사람을 만나다

-  봄이엄마와 호박전, 그리고 노루모산 


광복절을 지난 8월의 농촌은 둥근 호박이 지천으로 열리기 시작하는 때라 연일 밥상에 호박이 오른다. 어제는 찌개였다가 오늘은 국으로, 내일은 조림으로 ...... 뭐 그렇고 그런 이름만 다른 호박음식이 한 끼도 빠지지 않고 밥상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어느 집이나 얼추 비슷하다고 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너무 많이 달리다 보니 따먹지 못하고 놔두면 물론 늙은 호박이 된다. 늙은 호박은 겨울과 이른 봄까지 죽도 끓이고 떡도 하고 김장에도 넣어 찌개도 끓이고 이런저런 용도가 많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다 따내서 먹어도 어느 사이 주인도 모르게 숨어서 늙는 것이 호박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요 며칠 맛있는 부엌에 나와 밀린 일거리들을 처리하고 있자니 마을의 어르신들과 젊은 농부들이 자꾸 호박을 가져다주신다. 어쩌면 긴 장마와 태풍에 채소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는 소식에 농사지을 땅 한 자락 없는 내가 딱해서 가져다주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최근에 나는 호박 부자가 되었다. 


나를 호박 부자로 만든 둥근 호박들.


보기에는 시중에서 파는 애호박보다는 울퉁불퉁하니 못생겼지만 그렇다고 맛이 애호박보다 못하지 않으니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국이나 찌개는 물론이고 나물로 볶아도 절대로 이 둥근 호박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맛이 있다. 사각거리는 식감도 없고 씨도 꽤 커서 입안에서 그대로 느껴지지만 달큼하니 부드러운 그 맛을 한 번만 경험하면 헤어 나올 수 없다. 특히나 채를 썰어 전을 부치면 저절로 막걸리나 맥주를 찾게 된다. 우리 마을 위쪽 둘레길 어느 맘쯤에 있는 한 식당에선 밭에서 바로 딴 호박을 크게 툭툭 썰어 전을 부쳐 내주신다. 입에 바로 넣기 너무 뜨거워 입으로 후후 불면서 한 입 베어 물면 껍질 쪽은 아삭하고 씨앗이 든 속 부분은 말랑하게 익어 호박의 달달함에 기름의 고소함이 옷을 입어 그야말로 한 접시 더 해달라고 요청을 하게 된다. 

흔하고 흔한 된장찌개지만 마을에서 얻은 호박으로 끓인 된장찌개


된장찌개 끓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반사적으로 군침이 돈다.



속이 헛헛한 오후에 호박전이나 부칠까 하고 있다가 봄이엄마와 희음이엄마를 불러 차를 한 잔 같이 마셨다. 어제 서울서 내려오며 어찌나 실한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복숭아를 만나 몇 상자 샀기로 같이 나눠 먹을 요랑으로 불렀다. 차를 앞에 놓고 앉으니 저절로 수다 봇물이 터졌다.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호박에 이르러 박장대소를 하다가 눈물이 나다가를 반복하게 되었다. 다들 돌아가고 나서도 한동안 혼자 자꾸 웃다가 울다가를 한참이나 했다.    


커피말고 같이 홍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몇 차례 물을 더 붓고 우려 마신 홍차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봄이엄마는 하루 반나절씩 마을의 나이 드신 어른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늘상 그 어른께서 너무 잘해주신다고 자랑을 하는 터라 나도 직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게 하는 이웃이다. 어느 하루는 소갈비를 꽤나 많이 주셨다며 갈비찜 해먹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또 어느 하루는 자기가 호박잎을 좋아하는 걸 아시고 매일 호박잎을 따주시는 어르신 이야기도 했다. 그렇다고 늘 그렇게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한편 부럽기도 하고 한편 봄이엄마가 대견하기도 하다. 어떤 날은 일부러 김치를 넉넉히 담가 집집마다 나눠드리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을 같이 하지 않아도 되는 빨래를 하고 오기도 했다. 몸을 잘 쓰지 못하시는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을 텐데 즐겁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보기 좋기만 하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봄이엄마가 돌보는 분 중에 혼자 힘으로 반듯하게 걷지도 못하시고 거의 앉거나 눕다시피 밭을 매고 농사를 짓는 한 할머니다. 모밍 그리 불편하시니 주방에서도 앉아서 한 팔로 그리는 반경 안에 모든 것을 놓고 음식도 하시고 그 옆에 옷, 이불 등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다 놓고 사신다고 했다. 그러니 집안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다. 청소를 해드리겠다고 해도 손대지 못하게 하시는 터라 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누날 면사무소에 그 어르신을 형편이 아주 어려운 분으로 등록을 하고 대대적으로 집안 정리를 해주자고 신청을 하였단다. 그런데 면사무소의 답은 그 어르신의 통장에 잔고가 이 동네에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을 만큼 있으니 봄이엄마 본인의 노후 걱정이나 하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막걸리를 부르는 호박전.


오늘 그 할머니께서 호박을 주시겠다면 오라고 해서 다녀왔단다. 어른이 오라고 하시니 냉큼 달려갔는데 호박에 더해 호박전까지 부쳐놓으셨다고 했다. 부쳐놓은 호박전을 접시에 담아 먹으라고 주시니 한입 먹었는데 차마 더 이상은 먹을 수가 없어 아침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속이 안 좋다고 했단다. 전을 부친 프라이팬도 그렇고 담은 접시도 그렇고 주방의 청결 상태가 맛까지도 이상하게 느끼게 하더란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께서는 불편한 몸을 끌고 구석에 있는 조그만 상자에서 노루모산이라 적힌 통을 꺼내 그 안에 같이 들어있는 작은 숟가락으로 가루약을 한 숟가락 주시면서 입에 넣고 넘기라고 하셨단다. 손바닥에 받아 입에 넣으니 왜 손바닥에 묻히냐며 한 숟가락 더 먹어야 하니 이번엔 숟가락채 입에 넣고 넘기라 강요를 하셔서 별수 없이 그리 했다고 했다. 

너무 오래된 가루 소화제 노루모산을, 속이 나쁠 때마다 할머니 자신은 물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권했을 그 숟가락으로 두 번이나 받아먹은 이야기는 웃음이 나오는데 눈물도 같이 나서 그야말로 웃프다는 말을 실감했다. 봄이엄마는 호박전을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아 속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댔다가 오히려 누군가의 침에 의해 가루약이 굳어져 붙은 그 숟가락으로 노루모산을 두 번이나 먹은 이야기를 하고 남원으로 장을 보러 갔다. 


구글에서 업어온 사진 노루모산


코로나19로 난리가 난 이 비상시국에 그런 난리를 겪은 봄이엄마나 나에게 코로나19로 인한 불편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할머니는 최근 봄이엄마 외에 누구도 만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나는 봄이엄마에게 100개의 작은 알코올 솜이 든 상자 하나를 들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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