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열 번째 여름 OST>

파피와 알렉스의 달콤쌉싸름한 플레이리스트

by 한구멍

2026년 올해 첫 영화로 <우리의 열 번째 여름 People we meet on vacation>을 만난 것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행운이자 불행이다. 첫째, 자그마치 5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 이 소설의 작가 에밀리 헨리Emily Henry는 그녀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들이 차례로 영화화를 기다리고 있을 만큼 헐리우드가 가장 탐내는 작가가 되었으며 영화 속 데이비드의 결혼식 장면에서 파피 옆자리에 앉아있는 하객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 1시간 50분짜리 영화로 이렇게 완벽하게 각색한 작품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는 게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제아무리 뉴욕타임즈가 인정한 NO.1 베스트셀러이자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는 최고의 페이지터너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출퇴근 지하철에서 매일 2시간씩 읽은 결과 완독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만약 원작소설을 읽을 시간이 있다면 –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해외여행을 떠나는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 코를 심하게 고는 옆자리 승객이나 칭얼대는 아이들 울음소리에 잠자기를 포기한 상황이라면 또 모를까 - 그 시간에 영화를 몇 번 더 돌려보든가 아님, 하루가 멀다 하고 무수하게 쏟아져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들 중에서 이보다 나은 작품을 찾아보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게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훨씬 이득이라고 감히 권유하는 바이다.

둘째, 원작소설의 활자로는 차마 구현할 수 없는 파피와 알렉스의 눈빛과 표정, 몸짓 하나하나까지 화면 위에 실제로 환생시켜놓은 두 배우, 에밀리 베이더Emily Bader와 톰 블라이스Tom Blyth의 매력에 푹 빠진 나머지 며칠째 이 영화만 돌려보느라 요즘 아무 일도 못 하고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가장 끔찍한 불행이라는 사실. 지금 현재 영어자막 버전으로 4번, 한글자막 1번까지 총 5번 반복주행 중인데 특히 연락이 끊어진 지 2년 만에 바르셀로나에서 재회한 두 주인공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줘. 나 때문에 사라와 헤어진 게 아니라고. 네가 아직까지 혼자인 게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란 말야.” “당연히 너 때문이지” 라고 대화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서 – 원작소설의 표현을 빌자면 누군가 내 심장에 깊숙이 칼을 꽂아 넣고 그것도 모자라 옆으로 비트는 느낌이랄까 - 이미 열 번도 더 넘게 돌려 본 것 같다, 아놔.

그밖에도 원작소설에서 뺄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영화만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추가해서 재미와 감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시나리오, 보면 볼수록 디테일이 살아 숨 쉬는 브렛 헤일리Brett Haley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까지. 이 영화에 대해 칭찬할 게 차고도 넘치지만 -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현지 로케이션 장소들이 오로지 뉴올리언스와 스페인, 단 두 군데서 촬영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은 제작비 절감을 최우선시하는 넷플릭스 입장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주고도 남는다고 본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 <I want you back (2022)> 이후 재즈부터 댄스뮤직까지 이토록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쉴 새 없이 관객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하는 영화는 처음이라 영화를 돌려볼 때마다 음악감독의 안목에 놀라게 된다. 그건 아마도 주옥같은 삽입곡들을 선곡한 음악감독 키건 듀잇Keegan DeWitt이 실제로 인디팝밴더의 리드보컬로서 대중들의 취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영화 속 장면을 일일이 확인하며 찾아 들어본 영화 속 OST의 목록을 소개한다.

이름하여 파피와 알렉스의 달콤쌉싸름한 플레이리스트, 혹은 우리가 <우리의 열 번째 여름>에서 만난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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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olo & Pan – Nana (2017)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여행을 떠나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파피의 독백 - 나중엔 그녀가 쓰고 있는 기사의 일부분이라는 게 밝혀지지만 – 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 프랑스 출신 일렉트릭 듀오 Polo & Pan이 2017년에 발매한 정규앨범 Caravelle에 수록된 곡으로서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 중독성 있는 멜로디라인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발리 혹은 코타키나발루 해변의 바에 앉아 방금 웨이터에게 마티니 한 잔을 건네받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내가 OST 맛집을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확신을 심어준다. 예상했겠지만 “혼자 여행을 떠나면 당신이 호텔 방문에 걸어놓은 <방해하지 마시오> 표시 덕분에 당신이 욕실에서 비누를 밟고 넘어져 죽은 지 며칠이 지난다 해도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바람에 청소부가 달려오기 전까지는 당신이 죽은 걸 아무도 모를 수도 있...”으로 끝나는 파피의 기사는 원작소설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오로지 시나리오를 통해 영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거 맞냐는 편집장의 기습질문에 기사를 쓰고있던 파피가 깜짝 놀라 편집장을 돌아보는 순간 빵 터져버린 나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완벽하게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시작이 이 정도라 이거지. 그래 좋아, 대체 얼마나 날 웃기고 울리려는 작정인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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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aula Abdul - Forever Your Girl (1988)

처음 만난 알렉스가 이 노래를 듣고 똥 씹은 표정울 짓자 “어떻게 이 노래를 싫어할 수가 있어?”라고 핀잔을 주는 것도 잠시. 그러거나 말거나 색소폰 소리에 맞춰 파피가 제멋대로 어깨를 들썩이는 순간 나는 에밀리 베이더라는 여배우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후 그녀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사실까지도. 바르셀로나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예전처럼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알렉스의 말에 열이 받은 나머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아무렇게나 핸드백을 내던지는 모습, 당연히 이 모든 게 바로 너 때문이었다는 알렉스의 대답 – 자그마치 12년을 기다려온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만감이 교차하다가 결국 탄식을 내뱉는 그녀의 백만 불짜리 표정 연기는 수백 번 돌려보더라도 전혀 지겹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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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Polo & Pan — Ani Kuni (2021)

브렛 헤일리와 키넌 듀잇은 Polo & Pan의 열성팬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이 영화에서 빵빵 터지는 장면마다 Polo & Pan의 노래를 넣기로 의기투합했거나. 원작소설에서는 파피와 레이철이 함께 스피닝을 하면서 수다를 떠는 장면이 아주 잠깐 스치듯이 지나가 버리고 말지만 영화에서는 파피가 레이철(한국계 배우이자 가수로 활동하는 Alice Lee가 연기했다)과 함께 핸드폰을 뺏으려고 옥신각신하면서 알렉스에게 때마침 바르셀로나로 출장이 잡힌 덕분에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고 거짓말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그나저나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이 프렌치 일렉트릭 듀오의 노래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대박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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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obyn - Hang with Me (2010)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한 파피가 헤드폰을 낀 채 심취해있는 노래는 스웨덴 출신의 아티스트 Robyn이 2010년에 발매한 그녀의 6번째 정규앨범 Body Talk Pt. 2의 타이틀곡이다. 유로댄스 특유의 흥겨운 신디사이저 사운드가 오랜만에 알렉스를 만난다는 설레임에 잔뜩 들떠있는 파피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기막힌 선곡이기도 하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왜 이 노래가 여기서 흘러나와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나저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영화의 컨셉에 맞게 이 영화의 OST는 장르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국, 스웨덴까지 가수들의 국적도 불문하는 듯.


[Verse 1]

Will you tell me once again

How we're gonna be just friends?

If you're for real and not pretend?

Then I guess you can hang with me

한 번만 더 말해주겠니

어떻게 우리가 친구사이로 남을 수 있겠냐고

겉으로만 그런 척 하는 게 아니라 너 진심인 거 맞지?

그럼 우리 사귀어도 되는 거 아닐까

[Verse 2]

When my patience's wearing thin

When I'm ready to give in

Will you pick me up again?

Then I guess you can hang with me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나를 다시 선택해줄래?

그땐 우리 사귀어도 되는 거 아닐까

[Pre-Chorus]

And if you do me right, I'm gonna do right by you

And if you keep it tight, I'm gonna confide in you

I know what's on your mind, there will be time for that too

If you hang with me

네가 날 아껴준다면 나도 널 아껴줄거야

네가 믿음을 준다면 난 너한테 모든 걸 털어놓을게

난 네 속이 다 들여다 보이거든

이제 그럴 만도 하잖아

우리가 사귀기만 한다면 말야


*노래에 맞춰 몸을 들썩거리는 에밀리 베이더의 어설픈 춤실력이 영화적 재미를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IMDB에 올라와 있는 코멘터리를 확인해본 결과 그녀는 타고난 몸치란다. 뉴올리언즈의 바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촬영할 때도 자신의 춤실력이 들통날까봐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톰 블라이스에게 카메라에 안 잡힐 때마다 “날 좀 리드해 줘”라고 수십번 속삭였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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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Feel Like Funkin' It Up (1989)

파피와 알렉스가 뉴올리언스의 신나게 프렌치 쿼터 거리The Streets of the French Quarter를 돌아다니고 거리의 핫플인 카페 드 몽드Cafe Du Monde에서 프랑스식 디저트 베녜Beignes을 맛보며(이때 에밀리 베이더의 표정이 진짜 장난아니라서 죽기 전에 저 베녜와 허리케인 칵테일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뉴올리언스에 가보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아오른다) 신혼부부 놀이를 할 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뉴올리언스 출신(당연하게도!) 리버스 브라스 밴드Rebirth Brass Band의 재즈펑키넘버 Feel Like Funkin' It Up이다. 스페인에서 캐나다, 이태리 투스카니 등의 이국적인 장소들을 대신할 수 있는 곳을 모조리 찾아낸 능력만랩의 로케이션팀이 차마 뉴올리언스를 대신할 곳은 끝내 찾지 못해 결국 뉴 올리언스 장면만 진짜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는 사실은 그 펑키하고 그루브 넘치는 재즈의 영혼이 살아 숨쉬는 도시를 대신할 수 있는 곳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는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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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L-O-V-E (Italian Version)

맘마미아! 이태리 투스카니(실제로는 스페인에서 촬영했지만)를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노래 중에 L-O-V-E, 그것도 냇 킹 콜Nat King Cole 의 이탈리안 재즈넘버라니! 이러니 내가 어떻게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고 배겨내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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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YRIL - Stumblin' In (2023)

데이빗의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모두 모여 춤을 추는 장면에서 흥을 돋우는 댄스넘버는 전설적인 영국 락밴드 스모키Smokei의 리드보컬이었던 크리스 노먼과 미국출신 여가수 수지 콰트로가 1978년에 부른 올드팝을 호주 출신 DJ 시릴CYRIL 이 2023년에 리메이크해서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곡이다. 이때 춤추는 파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알렉스의 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아가씨야 That’s a heck of s girl”라고 말하는데 그녀의 저 뻣뻣한 춤솜씨를 보고 하는 얘기는 아니겠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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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ODESZA - Higher Ground (feat. Naomi Wild) (2017)

드디어 영화의 맨 마지막. 원작소설의 북커버 아트를 오마주한 엔드크레딧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미국출신 일렉트로니카 듀오 오데자ODESZA에게 가장 큰 성공을 안겨준 앨범 A Moment Apart에 수록된 Higher Ground이다. 프랑스 출신 일렉트로니카 듀오의 노래로 시작해서 스웨덴, 영국, 호주 출신의 아티스트들을 차례로 거친 후 결국 미국출신의 아티스트에게 마지막 바통을 넘긴 걸 보면 길고 긴 여행 끝에 알렉스라는 집으로 돌아온 파피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다.

어쩌다가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Higher Ground의 가사로 이 길고 긴 글에 마침표를 찍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니까. ■


So won’t you love me better?

I’m waiting here, I need you now

Gravity can’t hold us down

So just take me there to higher ground

날 더 사랑해주지 않을 건가요?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데

우리에겐 더 이상 중력이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나를 저 높은 곳으로 데려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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