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 덕분에 더 좋아진 노래들

<우리의 열 번째 여름> 알렉스가 색소폰을 싫어하는 이유

by 한구멍

<우리의 열 번째 여름 People we meet on vacation, 2026> 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 중에 하나.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는 카풀로 처음 만난 파피와 알렉스. 차 안에서 폴라 압둘의 Forever your girl을 들으며 몸을 들썩이는 파피를 보고 알렉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되자 파피가 묻는다.


Poppy : You hate this song. How is it possible you hate this song?

Alex : It's just the saxophone.

Poppy : What do you have against saxophone?

Alex : Name a single song that has been improved by the appearance of a saxophone. One.

Poppy : I can name literally hundreds.

파피 : 너 이 노래 듣기 싫구나. 어떻게 이 노래를 싫어할 수가 있어?

알렉스 : 색소폰 때문이야.

파피 : 색소폰이 너한테 뭘 어쨌는데?

알렉스 : 색소폰 연주 덕분에 훨씬 듣기 좋은 노래가 있다면 말 해봐. 단 한 곡이라도.

파피 : 수백 곡도 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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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알렉스 대왕님! - Alexander the Greatest는 파피의 스마트폰 연락처에 등록된 알렉스의 별명이다. 넷플릭스에선 ‘위대한 알렉스’라고 번역했지만 알렉스가 고대 마케도니아의 대왕이었던 Alexander에서 비롯된 이름인 데다가 평소 알렉스의 보수적이고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을 놀려먹는 걸 최고의 재미로 여기는 파피의 태도를 볼 때 원작소설처럼 ‘대왕님’이라고 번역하는 게 개인적으로 훨씬 더 문맥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네가 아무리 타고난 바른생활 사나이에 금욕주의자이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범생인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데이빗 보위의 Young american은 안 그래도 느끼한 노래가 색소폰 때문에 더 참고 듣기 힘들어졌다는 건 나도 인정할게. 하지만 영화 속에서 흘러 나오는 폴라 압둘의 흥겨운 노래 정도는 참아줄 수 있잖아. 네 옆자리에 앉은 사랑스러운 여자애가 색소폰 리듬에 맞춰 저렇게 신나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데 이 타이밍에 꼭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겠냐고!

파피는 실컷 음악을 즐기도록 잠깐 내버려두고 내가 파피 대신에 색소폰 연주 덕분에 끝내주는 노래 목록을 읊어줄게. 알렉스 넌 오하이오 린필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뜨기라서 아직 K-POP은 많이 생소하겠지만...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 엄선한 옛날 옛적 노래들이라 - 심지어 네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노래도 있을지 몰라! - 폴라 압둘의 노래보다 몇 배는 더 듣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 형 한 번 믿고 참고 들어봐. 넌 뼛속까지 착한 남자니까. 자, 그럼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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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아노 – 체념(난 너에게) (1996년)

그래, 넌 플레이버튼을 누르자마자 터져나오는 색소폰 소리에 “우웩, 이건 완전 케니 G 잖아!” 라며 경악하겠지. 네가 왜 케니 G의 소프라노 색소폰 소리에 진저리를 치는지 알아. 너처럼 오리지널 재즈의 고향 미국에서 태어나 재즈에 진심인 사람에게 케니 G의 색소폰 연주는 우리나라로 치면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던 차인표의 표정만큼이나 느끼하고 거북하게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재즈의 ‘재’자도 모르던 내게 처음으로 색소폰의 맛을 알게 해준 사람이 바로 케니 G야. 1985년 어느 날 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KBS 라디오 ‘황인용의 영팝스’에서 흘러나온 Songbird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니. 그러니까 그냥 참고 들어줘. 너무 상업적이고 대중적이라고, 재즈의 영혼을 팔아먹었다고 손가락질해도 좋아. 네가 아무리 뭐라 해도 형은 색소폰 하면 케니 G고 색소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이 노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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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현철 – 왜 그래 (1995년)

피아노의 체념이 너무 케니 G스러워서 듣기 싫다면 이 노래는 어때? 트럼펫, 클라리넷 등 각종 브라스 밴드 사이에 끼어있는 색소폰 연주는 케니 G처럼 느끼하거나 끈적거리지도 않고 오히려 펑키한 멜로디에 신나는 그루브를 더해주고 있잖아. 뭐? 어차피 충분히 신나는 노래니까 색소폰은 빼도 되는 거 아니냐고? 왜 그래... 색소폰 빠진 김현철의 ‘왜 그래’는 고무줄 빠진 팬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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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침 – 사랑했던 기억으로 (1991년) / 가을빛 추억 (1994)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서 유정연만큼 색소폰과 재즈에 진심인 사람이 또 있을까? 재즈 피아니스트 이영경과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팝재즈 듀오를 결성한 것도,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미국 필라델피아까지 날아가서 현지 최고의 세션들과 녹음을 한 것도 파피와 네가 팜스링스에 빌린 렌터카 ‘포드 아스파이어(Aspire : 포부)’처럼 한국 대중가요에 재즈의 영혼을 이식해보겠다는 유정연의 야심찬 포부 때문이었으니까. 그 거룩하고 위대했던 포부 덕분에 우리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이렇게 시대를 초월해버린 황홀한 색소폰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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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빅 마마 – Break Away (2003) / 김효수 – 또 다른 시작 (1997)

형이 색소폰 연주를 좋아하는 건 혼자서 독주할 때 보다 가수들의 목소리나 다른 악기들과 함께 어울릴 때 훨씬 더 멋진 사운드를 내기 때문이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코러스 전문 그룹 ‘빈칸 채우기’의 멤버였던 빅 마마의 신연아나 김효수처럼. 평소에는 늘 뒤에 숨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메인 가수의 목소리만으로는 완벽하게 채울 수 없는 노래의 빈칸들을 메우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대 앞으로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혼자만의 사운드로 관객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의 소유자.


그래, 이제 알겠다. 네가 왜 그토록 색소폰을 싫어하는지. 언제나 변함없이 네 자리를 지키며 파피의 빈 칸을 메워주는 너. 파피를 너무 사랑하지만 너와는 너무도 다른 꿈을 꾸고 있는 파피에게 너의 초라한 미래를 덮어씌울 자신이 없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파피의 자유로운 날개를 꺾어서는 안 되기에 사랑한다는 말 대신 친구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뒤로 숨어버린 너. 그런 너의 모습을 꼭 빼닮았기 때문에 색소폰이라면 진저리를 치게 된 거야. 너 역시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는 그런 네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증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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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동률 –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2001년)

그러니까 이제 ‘다시 사랑하다 말할까’ 고민 좀 그만하고 어서 파피에게 고백해. 예전처럼 다시 둘이서 여름 휴가를 떠나자는 너의 전화를 받고서 밤새 한숨도 못 자 엉망이라고. 그땐 우린 너무 어렸었다고.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기다려왔다고. 널 기다리는 게 나에겐 제일 쉬운 일이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여전히 난 부족하지만 받아주겠냐고. 널 사랑하는 게 내 삶의 전부라 어쩔 수 없다고 말야.

응? 이 노래엔 색소폰 연주가 안 들어간다고? 알지 알아. 근데 지금 너한테 가장 필요한 노래가 바로 이 노래인 걸 어쩌겠니. 그러니까 잔소리 좀 그만하고 어서 파피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가라고.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게 파피를 사랑하는 거, 그 다음으로 잘하는 게 달리는 거 잖아!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서 유튜브를 찾아보다가 AI로 만든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의 소울 버전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일까? 그 곡에도 끝내주는 색소폰 연주가 들어가 있으니까 꼭 한번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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