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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꿘녜 Aug 24. 2020

출간제의를 받은 백수


제목을 써놓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이게 나에게 일어난 일이 맞는지 아직도 실감을 못하겠어서. 그렇다. 나는 최근에 출간제의를 받았다. 인스타그램에 인스타툰을 게재한 지 84일 만의 일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약 3개월을 그저 쉬기만 하다가 인스타툰을 시작한 건 사실 엄청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쉬는 동안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욕망 하나로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거창하게 시작했다가는 보기 좋게 포기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가볍게 시작하기도 했다. 얼마나 가볍게 시작했는지는 처음 작업했던 스케치 노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15년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받았던 사은품 노트. 원대한 포부를 품고 새 노트를 신중하게 고른 뒤 무언갈 시작하면, 언제나 두 세장을 넘기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곤 했던 과거의 실패 경험에 기인했던 탓일까. 나는 첫 스케치를 이렇게 굴러다니기만 하던 아무 노트를 집어 들고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가볍게 시작하고자 했던 마음은 실제로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저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그림으로, 글로 잘 풀어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림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겠다는데'하는 마음으로 제약 없이 신나게 구상하고 그려댔다.


글감은 주로 예전에 써뒀던 일기들을 활용했다. 지금은 용도가 바뀌어버렸지만 페이스북에는 지난 나의 일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에 많은 공감을 받았던 일기들을 주로 꺼내 다시 다듬고, 그림을 입혔다.


그런데 그게, 반응이 꽤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도 반응이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좋아요 200개가 2만 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게 아닌데, 내 부족한 글과 그림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가 된다며 따뜻한 댓글과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참 이상했다. 내 컨텐츠에 반응을 해주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반응에 되려 위로를 받는 나 자신이.



그렇게 인스타그램에 열아홉 번째 컨텐츠를 올리던 시점에,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실은 전부터 내 컨텐츠들이 좋다며, 출처를 밝히고 그대로 실어주시던 파워페이지 담당자로부터 온 가벼운 연락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출판사 마케터였다. 지금 작업하는 것들을 책으로 만들어볼 생각이 없냐고 물으시기에 '언젠가는' 그리 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대답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언젠가는'이 지금이 됐다.


가슴이 벅차 올라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벙벙한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눈물도 살짝 났다. 가볍게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작품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어릴 적부터 내 이름을 건 책을 내보고 싶다는 소망이 늘 있었는데 그 꿈에 크게 한 발짝 다가간 것 같아서 기쁨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샘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고 계약까지 완료를 했다. 이 글 제목 그대로 나는 이제 그냥 백수가 아니라, '출간제의를 받은 백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예전과 똑같이 글감을 고민하고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편집자님 말씀대로 책은 긴 호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처럼 똑같이 일상을 유지하면 된다. 그런데 자꾸만 비집고 새어 나오는 이 웃음을 어찌해야 할까. 당분간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말을 요즘 자주 생각한다. 아무 계획 없이 대기업을 퇴사하고 그저 놀다가 가볍게 시작한 인스타툰으로 출간제의까지 받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인생.


언제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만 하고 남들보다 잘난 게 없다며 움츠린 채 살아왔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어깨 펴고, 나 자신에게 대단하다고 사실은 그동안 아주 잘 해온 거라고 말해주어도 될 것 같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 앞으로도 틀림없이 잘하는 일만 남았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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