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세 번째 퇴사를 하고 세 번째 퇴직금을 받았다. 나는 평소 재정적인 면에서 그리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 퇴직금은 대부분 해외여행과 나를 위한 보상(이라 쓰고 충동이라 읽는다)소비에 사용하곤 했는데, 세 번째 퇴직금만큼은 다르게 사용해야 했다.
우선 당분간은 이직 계획이 전혀 없었고, 월 이자가 40만 원씩 나가는 전셋집에 살고 있는 1인 가정의 가장이라는 점 때문에 퇴직금을 소극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쁜 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뒤덮고 있던 시점이라 해외여행에 돈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지도 못했다. 뭐, 바이러스가 없었어도 여행은 가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나는 세 번째 퇴직금을 받아 들고서 이 돈을 아주 잘개 쪼개 오랜 시간 연명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고 기나긴 백수 생활을 꿈꾸며.
제일 먼저 한 일은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한 달에 얼마인지 파악하는 일이었다. 대출 이자, 보험료, 각종 친목용 곗돈, 휴대폰 요금, 관리비, 데이트 비용 등을 계산하고 나니 한 달에 숨 쉬는 비용만 대략 120만 원이 나왔다. 흐에엑. 생활비는 뺐는데도 이렇게나 많다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충동적으로 사대던 시절은 이제 끝이 났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역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더니. 자유를 얻고 나니 얼어붙은 통장만이 내게 남아있는 현실이로구나.
원래도 집밥을 즐겨 먹었지만 더더욱 외식을 줄였다. 그리고 바이러스 때문에 각종 친목 모임들도 자연스럽게 하나 둘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출도 줄어들고, 국가에서 재난지원금을 70만 원이나 준 덕분에 연명의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되기도 했다. 가끔은 통장에 정기적으로 새겨지던 '입금' 글자가 그리워 당근마켓을 몇 번 이용한 적도 있다. 가뭄에 단비처럼 꽤나 쏠쏠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통장의 미래는 잠시 접어둔 채 자유만 만끽하며 지낸 지 5개월에 접어들 무렵,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은 두 달만 목놓아 쉬어보고 이직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5개월이 훌쩍 흐른 뒤였다. 쉬면서 나름 글도 쓰고 인스타툰도 연재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오기는 했지만 창작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슬금슬금 깨닫기 시작한 터였다.
성실과 친절은 체력에서 나오고 여유로움은 두둑한 통장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통장에 적힌 퇴직금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어갈 때마다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독하게 나쁜 바이러스가 취업 시장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리고 간과했던 하나의 사실. 나는 경력 8년 차라 이직 시장에서 그리 환대받지 못하는 '몸집이 무거운 구직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지만 더 늦기 전에 몸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이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략 4개월 동안 총 열다섯 군데의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나름 시행착오를 겪으며 퇴사를 어렵게 결정한 만큼 다음 회사는 더욱 신중하고 싶었기에 '정말' 가고 싶은 회사 위주로 지원을 했다.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꼼꼼히 서류들을 준비했다. 자기소개서에는 진심을 듬뿍 담았다.
그리고 열다섯 군데의 회사 중 열네 군데에게서 불합격을 통보받았다. 이 문장은 다르게 읽으면 한 군데의 회사에서 합격 목걸이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앞서 퇴직금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내 자신감도 함께 떨어졌다고 봐야 할까. 글쎄, 완벽하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일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 더욱 채찍질을 가할 수 있게 된 것.
아무리 내가 퇴사를 하고 창작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것으로 프리랜서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언젠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퇴직금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일을 구해야만 했다. 때문에 퇴직금의 숫자는 나를 채찍질해주는 요소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게 많이 위축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1인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계의 위협 때문에 초조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감 결여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당장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지만 콘텐츠로 풀어낼 수 있는 내 영감의 원천은 늘 마르지 않았기에 무언의 자신감이 있었던 걸까? 어휴. 내가 이런 표현을 직접 한다는 게 다소 부끄럽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다.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고 싶었고 구직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콘텐츠 제작을 병행해 왔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만약 그런 게 없었다면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래된 포트폴리오 하나로 이렇게 꾸준히 자신감을 장착하기가 쉽지 않았겠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력서를 쓸 필요가 없는 지금에도 꾸준히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비단 퇴직금이 떨어지는 순간뿐만 아니라, 그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기 위해. 나만의 빛을 영속해나가기 위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 단단해지기 위해.
나의 일에 있어서 언제나 자신감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