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직장은 대행사였다. 아무리 대행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대행’이라는 단어의 뜻은 알 것이다. 남을 대신하여 행하는 일, 또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고된 노동 인지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첫 직장이 대행사였어도 분명 설렘이 있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다발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대행업의 장점이 내 성향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기도 했었다. 그래서 힘든 순간이 많았어도 그 또한 나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라 생각하며 힘차게 회사생활을 이어 나가곤 했다. 실제로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
그런데 3년 차가 되었을 무렵, 조금씩 ‘이건 아니다’라는 신호가 머릿속에서 깜빡이기 시작했다. 가장 흔한 신호는 야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 새벽 3~4시를 넘기는 일이 잦았고 퀭한 눈으로 겨우 잡아 탄 택시에서는 “어유, 재밌게 놀다 가시나 봐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나중엔 반박할 에너지도 없어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던 나. 다시 생각해도 참 측은하다.
두 번째로는 월급이 밀렸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이냐 하면, 일단 생활 자체가 안 된다. 당장의 월세와 카드값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특히 나처럼 돈을 얼마 모으지 못한 사회초년생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법인카드까지 막혀 사업 운영을 개인 신용카드로 쳐내기 시작한다. 물론 직급이 낮았던 내가 쓴 금액은 높지 않았지만 프로젝트 제반 비용이 내 카드에서 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이렇게 야근이 많고 월급이 밀리면서도 당장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눈 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는 데도 지옥에 적응한 채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 소름 돋는 사실을 야근하고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깨달았다. 너무 고단하고 졸렸던 어느 새벽 날,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출근하고 싶은데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씻고 다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죽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지금 교통사고가 나면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그럼 회사도 안 가고 좋을 텐데.’
아주 짧은 순간, 달콤한 상상을 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육성으로 “미쳤다”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내가 지금 우울증일 수 있겠구나. 나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구나. 처음 제대로 인지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린 다음 날, 종이에 하나씩 써 봤다. 내가 이 회사에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과 아닌 점. 역시나 아닌 점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무리한 야근으로 인해 허리가 나갔고 당시 만나던 사람에게 대차게 차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일에 대한 보상을 돈으로 기대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적어도 월급이 밀리지 않는 곳으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그때의 도망은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첫 회사에서 3년 이상을 버티지 못해 도망쳤지만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되려 삶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도망의 순기능을 체득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는 링컨의 명언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때도 그때다.
나의 온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도 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 삶이 어느 것 하나 행복하지 않을 때.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조금씩 도망치는 삶을 살고 있다. 나에게 맞지 않는 게 무엇인지, 내가 견딜 수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뿐이다. 미련은 접어둔 채 최대한 신중하게 도망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더 나은 삶을 빨리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불행을 피하고 싶다면 도망쳐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멀리,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